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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 그리고 상록의 아들 | 이돈구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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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5-03 11:20 조회1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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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구 (임학, 1965)의 회상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이돈구 산림청장_01.jp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016pixel, 세로 2704pixel사진 찍은 날짜: 2011년 03월 09일 오후 2:37 모교 명예교수 이돈구(임학65)
1965년 2월말 수원 캠퍼스의 기숙사 (상록사; 1동: 핑크색이라 크레물린궁, 2동: 청색이라 청와대, 3동: 흰색이라 백악관)에 입사하게 되었는데 나는 3동 3207호에 배정되었다. 한방에 4명이 같이 사용하는데, 신입생이 위 층 침대를 사용하도록 규정이 되어 있었고 선배들이 아래 층 침대를 사용하였다. 모두 선량한 분들이라 매우 재미있는 기숙사 생활이었다. 공동 단체 생활이라 모든 규칙을 잘 지키고 깨끗하게 생활해야 했다. 아침 6시에는 일어나라는 음악, 7시에는 아침식사의 시그널 뮤직에 따라 식판 들고 줄서서 기다려 식사하고, 식사 후 모든 기구를 반납하는 것이다. 당시 기숙사 매월 비용이 1,360원이라 기억된다.
 
농과대학 임학과 (현재는 농업생명과학대학 산림과학부)에서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대학생활 모두가 새로웠다. 강의 과목에 따라 강의실을 찾아갔고, 담당교수님들이 너무 연세가 많아서 농담은 할 수 없었다. 1학년 때는 교양과목으로, 영어, 국어, 철학, 문화사, 독일어, 수학 (미적분), 체육 등이었다. 자연과학개론은 조백현 선생님이 가르치시며, 생명의 근원은 자연과학에서 찾아야 된다 하셨다. 영어는 1학기에는 조성지 교수님, 2학기에는 문리대 (현재 인문대) 이상옥 교수님께서 『Rain and Other Stories』라는 교재로 가르치셨다. 문화사는 강사 선생님으로 자주 오시지 않아 배운 것이라곤 “산통과 산가치”를 예로 들고 “산통 깬다”라 하신 말이 생각난다. 즉, 점쟁이가 산가치를 산통에 넣고 흔들어서 잡아내면 그것으로 길흉을 알 수 있는데, 만일 산통이 깨지면 산가치를 넣고 흔들 수가 없으니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의 어원이란 것이다.
 
임학과는 정원이 25명이었고 1학년 때는 교양과목을 잠사학과 학생들과 합반하여 수강하는 기회가 많아서 타 과 친구보다는 더 가까웠다. 대학생이 되니 두발에 대해 누구도 잔소리가 없고, 신입생이라 교복 (남색 정장에 넥타이)과 둥근 빵 모자를 착용토록 하고, 모든 학생은 기숙사에 입사토록 규정하여 공동 생활토록 하였다. 따라서 같은 호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숙사의 같은 층, 같은 동에 계신 분들과 친하게 지냈다. 가끔 기숙사 학생을 위한 초청 특강 (예로, 가나안 농군학교 창시자 김용기 장로님의 부지런한 손, 일꾼), 봄과 가을에는 상록사 (남학생 기숙사)와 녹원사 (여학생 기숙사)가 오픈하우스를 개최하면서 축제를 열어, 남녀 친구를 초청하여 하루를 즐기기도 하였다. 독특한 것은 마침 봄 축제에는 서둔동 푸른지대 딸기 축제가 있어 남학생들의 주머니가 바닥나기도 하였다. 또 학과의 학년끼리 타 대학 여학생들과의 미팅이 많았고, 기숙사 실원 미팅도 재미있던 기억 중의 하나이다. 특히, 가을 상록축제에는 졸업을 앞둔 학생 중에서 학교발전을 위해 공헌한 학생을 선발하여 시상하면서 나무와 대학 시작의 의미를 임경빈 교수님으로부터 듣기도 하였다. 1학년 시절에 학과 동기생들은 우리들의 동아리를 “은사시회” 라는 이름으로 하고, 수리산 등으로 캠핑을 가서 텐트치고 항고에 밥을 지어서 국을 끓이고 술도 마시고 캠프파이어를 하였던 기억도 생생하다. 수원캠퍼스에서 매우 마음 속 깊게 박혀있던 것은 크고 곧게 자란 리기다소나무의 울창한 숲 (1900년대 초에 도입되어 처음으로 우리나라 서둔동 연습림에 심었다)이었다. 나무 밑바닥은 깨끗하여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유는 동네 사람들이 낙엽을 모두 가져가서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학년 2학기 때 기숙사를 퇴사하고 서둔동 이화의원이라는 건물 (학교 관사로 전에는 여학생 기숙사로 사용함) 내부의 조그만 방으로 이사하였는데 이 방은 정지웅 선생님 (농업교육과)에게 할당된 방 (겨울에 구공탄을 아궁이에 넣어 방을 덥히는데 일산화탄소가 스며들어 죽을 뻔 했던 기억도 있음) 에 내가 사용토록 허락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내가 스스로 서둔교회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2학년부터는 전공과목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는데, 식물분류학, 수목학, 산림측량학, 식물병리학, 토양학, 농업기상학 등을 배웠다. 다행히도 1학년 성적이 우수하여 우리 학과에 배당된 5.16장학금 (현, 정수장학회)을 받게 되어 등록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16,000원이었는데 장학금이 매 학기에 25,000원을 받으므로 여유도 있었다.
 
전공공부도 필요하나 친구와도 만나고 데이트도 하려면 용돈이 더 필요하여, 입주 아르바이트 (입주하여 가정교사 하는 일)를 하였다. 매산로 부자 집의 아들로 수원중학교 2학년생을 지도하는 것인데, 가르치는 자체 보다, 학생이 나의 지도계획에 순종하지 않아서 힘들었다. 입주하여 지도하므로 숙식은 물론 매월 용돈을 2,000원을 받았다. 3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 (1968년 2월경)에 현신규 교수님께서 나를 찾으셔서 뵈었더니 “자네는 학부 졸업 후 무엇을 하려고 계획하는가?” 하셔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여기 연구실에 와서 공부도 하고 근무 직원도 보살피며 연구실을 지키면 월 7,800원 (300원 x 26일)의 봉급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현 박사연구실에 남아서 임학분야, 특히 임목육종학 분야를 공부하기로 정하고, 1968년 2월부터 그곳 연구실에 들어가 4학년 1학기부터 연구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게 연구 프로젝트를 맡기셨는데, 제목이 “개량포플러 생장 실태 조사연구”였다. 1968년도 총 연구비는 150만원으로, 4명의 직원봉급, 현 박사님의 연구보조비 (학술지 및 외국 도서 구입, 실험실습 재료비, 전기료, 난방비, 온실관리비 등) 등이었다. 이렇게 대학 4학년 과정을 마치고 (총 168학점 이수함. 4년간 전체 평점이 2.7/3.0), 대학원 석사과정에 응시하였는데, 2명이 임학분야에 합격되었다. 시험과목은 전공, 영어 (영작, 해석) 그리고 제2외국어로 독일어 (해석 문제로 주로 Von Natur und Mensch에서 출제)였다. 나의 연구는 솔잎혹파리가 확산되어가는 선단지로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산에서 솔잎혹파리 피해를 받은 리기다소나무와 소나무를 발견하여 그곳을 조사연구지로 매주 방문하여 관찰하였다. 수원캠퍼스에서 오전에 버스로 출발하여 그곳에 도착하여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를 더 깊게 연구코자 박사과정에 진학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석사졸업 전, 1971년 1월 1일자로 현장 유급조교 발령을 받게 되었고, 현신규 지도교수님께서 박사과정에 입학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며칠 후에 교수님께서 학과 교수님들께서 조교로서 박사과정으로 진학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시면서, 입학할 수 없다는 말씀이셔서, 나는 매우 실망하였다. 따라서 나의 소망과 공부의 목표는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어서 이때부터 유학을 가기로 작정하였다.
 
매주 화요일 저녁에는 해외 유학을 준비하는 대학원생 또는 졸업하신 10여명이 농촌진흥청 외국인 고문관 (Dr. James Cobble, Dr. Everett Christopher) 관사에 가서 대화를 하면서 미국생활을 배웠고 나중에는 농과대학 농경제과에 근무하신 Dr. Southworth 관사에서 계속되었다.
 
나의 생애에 가장 큰 변혁은 1학년 2학기에 나 스스로 수원 서둔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한 것이다. 옛날 초등학교 3학년 때, 묵방리 교회에 몇 번 참석해서 사탕 등을 얻어먹은 기억 외에는 없다. 내가 기독교를 택하여 교회를 자진해서 갔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볼 때, 매우 대단한 결단이며 변화였다. 석사 학위 이후 미국 유학이전 까지 (1971년1월 1일 ~ 1973년 5월 14일) 나는 임학과 현장조교 (교육공무원으로 유급조교이며 월급이 30,000원 정도며, 이는 고등학교 교사 봉급수준)로 일하게 되었다. 즉, 임업묘포를 담당하므로 묘포실습 및 작업이 주로여서 임경빈 교수님의 강한 훈련을 받았다.
1981년 11월 13일 조교수 발령을 받고 전산학개론 (Fortran Programming), 통계학, 자료전산처리, 산림생물학, 조림학 (조림 및 복원생태학) 등을 가르치고 연구하였다. “Fortran Programming”은 인기가 많아 매학기 2강좌를 개설하여 250명 학생이 수강하였고 나는 강의를 더 잘 하기 위해 서울의 모 학원에 가서 강의 방법을 배워서 적용하였더니, 더 인기였다. 한 에피소드는 여름방학에 학생이 찾아와서 학점을 따지러 온 줄 알았는데, 그는 이 과목을 4년간 수강과목 중 가장 흥미가 있어서 현재 미국에 가서 컴퓨터관련 학문을 전공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수원캠퍼스가 넓고 각 학과 건물이 서로 떨어져 있어서, 행정관 또는 강의실에 가다가 교수님들을 자주 뵙고 인사도 나누었는데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후에는 서로 만나는 기회가 적어졌다. 수원의 건물이 매우 낡아서 모든 책임을 맡았던 학장 시절 (1999. 7. 27 ~ 2001. 7. 26)에는 화재나 혹은 폭우로 인한 파손이 걱정되어 주말에도 학교를 둘러보았다. 농생대 모든 가족이 바라던 관악이전의 시작인 1999년 12월 마지막 총장 학장회의에서 국수봉 아래 후문 부근에서 자연대 부근 운동장 (현재 농생대 위치)으로 이전이 결정되었다. 드디어 2000년 2월 24일 (졸업식 2일전)에 착공 기념식을 하고, 철근 기둥과 시멘콘크리트의 골격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나의 학장임무는 모두 마쳤다. 2003년 8월에 관악으로 이전하여 “관악에서 미래로”라는 소망으로 교수생활이 다시 시작된 기분이었고 2012년 2월말 31년간의 교수생활을 마쳤다. 회고하면 수원의 열악한 환경 (비행기 소음, 강의/연구시설의 낙후 등)에서도 녹색혁명을 이룬 것은 모든 교수, 학생, 직원 그리고 동문들의 뒷받침과 지원 그리고 기도의 힘이라 생각한다.
 
농생대는 앞으로 관악캠퍼스의 타 대학과의 긴밀한 협력과 교류를 통해 동반성장하여, 우리가 외국/외부로부터 받아온 혜택을 되갚는 마음으로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기를 소망해 본다. 한 가지 아쉬움은 2000년도에 우리 대학 역사상 처음으로 “노무라연구소의 컨설팅”을 받아 “바이오 그린 그리고 벤처”를 지향하라는 제안이 있어서, 평창에서 그린바이오를 실천하고 있으나, 작물 (식량, 원예 등)과 수목의 육종, 식품, 토양, 수리, 기계 자동화, 조경, 환경 등 모든 농림업을 같이 할 수 있는 스마트 농산업 프로그램이 서해안 지역에서 실행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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