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시절과 나의 삶 > 주요소식

본문 바로가기

Since 1948, www.snuagria.or.kr 페이스북아이콘트위터아이콘

주요소식

동창회보주요소식

동창회보

주요소식

상록 그리고 상록의 아들 | 대학원 시절과 나의 삶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5-03 11:16 조회121회 댓글0건

본문

대학원 시절과 나의 삶
박종열(임학박98졸) 경상대 명예교수
동창회 창립 70주년을 맞아 지난 시절을 한번 되새기며 후배들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까마득한 옛날 수원에서 공부한 시절을 나열해 본다.
 
나는 대학원 임학과에 1969년에 입학하였다. 진주농과대학을 졸업하고 공군을(37개월) 제대하고 서울 동숭동에서 대학원 시험을 치렀는데 영어, 전공, 독일어 과목을 보았다. 대학원 입학을 타교출신으로 처음으로 합격을 하였다.
 
3월 말에 수원캠퍼스에서 처음 이창복 교수님 연구실을 찾아가니 교수님 첫 말씀이 ‘자네 어떻게 합격했지’ 하면서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나의 ‘선생님 공부하러 왔습니다!’ 라는 대답에 큰 눈을 뜨시면서 열심히 하겠느냐고 물으셨다. 무조건 ‘예’라 하니 바로 실험실로 데리고 가서 일을 시켰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밤잠을 설치며 정말 열심히 하였는데 시킨 일을 마무리해서 제출하면 바로 또 다른 일을 주셨다. 한 학기가 지날 무렵 오토바이에 나를 태우시곤 호매실 임목육종연구소를 지나 농장으로 갔다. 싸리나무를 많이 심어 놓으셨는데 종류는 싸리나무, 참싸리, 해변싸리, 조록싸리, 비수리 등등 이었고 교배 작업을 시켰다. 매일 학교와 농장을 오가며 선생님이 오토바이를 태워주셨다.
논문을 정색반응에 의한 싸리속의 분류학적 연구로 정하였는데, 콩과 식물 중 우리나라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싸리류는 땅이 척박한 곳에도 잘 자라기 때문에 지피식물조성용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그 요구도가 높았고 또 사료작물, 섬유자원, 밀원자원, 관상자원으로서 그 용도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싸리의 종류는 Nakai 는 15종을 발표하였고 uyeki 는 3종 추가시켰고, 이창복 선생님은 1947년에 20종으로 분류하셨다.
그 후 1965년 The Lespedeza of KoreaⅠ에서 10종 7변종 5품종12잡종으로 보고하고 해부학적인 특성과 형태학적 특성에 입각한 식별법은 근연종(近緣種)의 식별이 곤란할 때가 많으므로 화학적인 방법에 의한 목재의 정색반응을 연구하여 식별을 시도하였는데 본 실험에서는 HCl, K₂Cr₂O₇, KMnO₄, KH₂PO₄, NH₄OH, FeSO₄․7H₂O 등 시약을 사용하여 싸리류의 식별을 쉽게 분류할 수 있는 결과를 얻었고 검색표도 작성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1972년 한국임학학회지 No.15 p.21~31에 보고되었다.
 
대학원 석사과정 중에 현신규 교수님, 임경빈 교수님, 이필우 교수님, 김갑덕 교수님, 우보명 교수님 그리고 임목육종연구소 박종완 과장님, 이성섭, 한영창, 김재현 선생님들의 은혜를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
 
대학원 생활 중에 실습을 많이 다녔는데 임학과 2학년 학생들을 인솔해서 수리산, 광교산, 속리산, 칠보산, 계룡산 등에 다니며 채집도 하고 수목도감의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리고 임목육종연구소에서 그동안 채집한 표본들을 분류정리하면서 농촌진흥청에서 주관하는 전국 초지조성작업의 기초조사로서 진주농과대학 김병호 교수님과 같이 경상남북도를 조사하였고 지도교수님과 문화재 관리국에서 조사 의뢰된 과제도 많이 수행하였으며 임경빈 교수님의 고향 경북 예천군의 남산 전체를 공원화하는데 수목배치설계도를 작성하여 용돈도 많이 받아 공납금을 낸 기억도 난다. 그리고 전국 50명에게 주는(월2만원씩) 과학기술처장관 장학금의 혜택도 받았다. 이 때 하숙비가 월 3천 원이었으니 큰돈이었다. 매달 동숭동 대학원 본부에 가서 수령을 하였는데 서둔동 딸기를 선물한 것도 생각난다.
 
1971년 7월 12일 진주농대 임학과로 조교 발령을 받아 고생이 말이 아니었는데 묘포장 관리, 교수교재 Print, 학생들 실습 등 눈코 뜰 새 없이 열심히 하다 보니 1978년 11월 30일에 전임강사가 되었다. 지금도 그 시기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난다. 등사판에 인쇄잉크로 프린트를 하는데 하루 5000매도 해보았다. 교수님들 논문, 묘포장, 지리산(산청군 시천면, 삼장면)에 있는 일제강점기시절 구주대학에서 관리했던 연습림(4500정보)에서 실습을 맡아서 하였다. 그리고 1974년 임학과에서 임학공학과 신설을 문교부에 신청하였으나 인가가 되지 않았고 1976년에 임학과 40명(임학전공 20명, 임산공학전공 20명)으로 정원을 배정받았다. 임학과에서는 과목이 나오지 않아서 임산공학의 제지공학을 하게 되었다. 말 못할 고생도 많았으나 지금은 다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
 
197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임학과에 입학서류를 내었다. 전공이 제지공학으로 바뀌었으므로 고생의 길로 들어갔으나 어떻게 하든지 열심히 해서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고 진주에서 수원까지 매주 7시간 걸려서 기차를 타고 다녔다. 박사과정 교과목을 많이 땄으나 석사과정 학점이 인정이 되지 않아 1년을 더 공납금을 내고 재입학하여 1983년에 수료하였다. 1989년부터 중국, 미국, 대만, 말레이시아, 홍콩, 인도네시아, 몽골, 러시아 등의 제지공장과 학교 및 연구소를 많이 견학하였다. 1993년에는 일본의 구주대학교 농학부 임산공학과 목재화학실에서 방문연구교수로서 있으면서 연구와 관련한 논문준비를 하고 귀국하였다. 1997년에 다시 대학원에 입학하여 98년에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도공안료의 혼합과 증점제의 특성이 도공지의 광택발현성과 구조적특성에 미치는 영향」으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심사를 해주신 신동소 교수님, 안원영 교수님, 이필우 교수님, 정희석 교수님, 이전제 교수님 그리고 이학래 교수님께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며 지냈다. 훌륭하신 교수님들의 지도를 본받아 나 역시 교육에 정진하여 수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항상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열심히 삶을 영위하는 것이 선배에 대한 도리라 생각했고 후배들에게는 본보기가 되도록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서울대학교 농생대 동창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끝으로 옛 선인의 글귀를 적어본다.
 
군자신독(君子愼獨) -낮은 데서 살아본 뒤에야 높은 데를 오르는 위험을 알고, 어두운 데 있어본 뒤에만이 밝은 데로 향하는 큰 드러남을 알며, 고요함을 지켜본 뒤에만이 움직임을 좋아한 번거로움을 알 것이며, 침묵을 길들여본 뒤에만이 말 많은 시끄러움이 귀찮은 것임을 알 것이다.”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