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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상록인의 사회참여, 농대 70년대 학생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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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1-08 11:26 조회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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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70주년 기념 특집 기고) 상록인의 사회참여, 농대 70년대 학생운동사
-부제: 1975년 4월 11일, 그 날을 돌아보며- 동창회보 편집실
 
1.기획의도
농학11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2016년 9월 10일에 있었다. 우리 대학은 농학의 산실로 학문과 산업 여러 분야에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식량난 해결과 산림녹화 등은 우리나라를 경제적 빈국에서 지금과 같은 부강한 나라가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훌륭한 동문들은 명예의 전당에 헌정도 되고 ‘자랑스러운 상록인대상’ 등 대학과 각 단체에서 주는 상을 받고 동문들의 찬사를 듣고 있으며 졸업한 우리 스스로도 그에 자부심을 가지고 동문으로서 명예를 지키려 부단히 각자 자리에서 모범이 되고자 노력한다. 해마다 상록의 날이면 우리 동문들의 이름으로 ‘자랑스러운 상록인 대상’을 우리의 자랑스러운 동문들에게 수여하고 있다. 그러나 영광과 자부심 저 뒤편에 마치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처럼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기시 되는 이가 있다. 70년대 유신정권하에서 목숨으로 저항한 68학번 ‘김상진(축산68)’ 동문이 바로 그다. 당시엔 그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고 이젠 세월이 흘러 그 이름조차 아득한 것이 현실이 되었다. 이에 동창회 70주년을 맞아 이렇게 동창회보의 한 면을 빌어 다시 그를 주목하고자 한다.
마침 그의 활동에 대하여 서울대학교농업생명과학대학이 2006년 출판한 농학교육 100년사에 상세한 설명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동문은 이 책을 접하기 어렵기 때문에 편집부에서는 100년사의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하고 몇몇 동문에게 김상진 열사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동창회보에 이런 글이 실리는 의미를 요청하여 결론에 대신하고자 하였다.
대학에서 연마한 지식으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기 보다는 지성인으로서 바람직한 사회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바쳐 민주화의 제단에 받쳐진 김상진 동문을 기리는 것은 이제 우리가 그의 공로를 인정하면서, 더 이상 잊히기 전에 그 어려웠던 시절 참여와 안위라는 두 갈레 길에서 가슴앓이 하였던 7080학번 동문들의 이상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부족하지만 그 시절 그가 외친 소리를 특집으로 다루어 운명을 달리한 그의 넋을 위로하고자 한다.
 
2. 70년대 농대 학생운동
1)70년대의 시대적 상황
1971년 대학가는 4월27일 대통령선거 이후 부정선거규탄과 학원을 병영화하여 통제하려는 교련교육에 반대한 교련거부 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71년 8월 28일 교수 600여명이 대학자주선언을 발표하였고 서울대 농대를 비롯한 서울대 12개 단과대학 학생처장들은 교수들의 대학자주선언 지지와 교련수강 거부를 결의하였다. 당시 학생들의 교련반대투쟁은 6.3항쟁이후 가장 치열한 시위였다. 학생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부정부패 척결과 사회개혁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이처럼 학생들의 투쟁이 더욱 가열되자 정부는 학원에 군인을 투입하여 학생들을 진압하는가하면 국방부장관과 문교부장관 공동으로 ‘교련거부 학생은 강제로 징집 하겠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급기야는 10월 15일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수도경비사령부와 공수특전단 및 경찰병력을 서울대 등 8개 대학에 투입하여 1,899명의 학생을 연행, 이 중 119명을 구속하는 등 학생들의 투쟁을 강력 진압하였다. 학생들을 강제 진압한 박정희 정권은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을 공포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시키는 한편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이어 12월 27일 박정희의 8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가혹한 유신독재 체제가 시작되었다. 유신체제는 곧바로 학생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는 학생비상총회를 열고 유신타도 투쟁에 나설 것을 천명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대학가는 유신타도 투쟁에 총력을 기울여 전개하였고 서울대 농대 또한 1973년 11월 9일 약대, 치대와 공동으로 한신대에서 유신독재 성토대회를 갖는 등 적극적인 투쟁대열에 합류하였다. 학원가의 유신타도
보라! 과연 이 시대는 죽은 것인가. -중략-
역사와 민족 앞에 이 닫힌 시대를 활짝 열기 위하여 대학은 안이한 상아탑으로 남기를 거부한다. 자유와 정의를 버리고 금력과 권력에 결탁한 사회 속에서 우리의 학업은 무엇을 위해 봉사하여야 하는가! -중략-
지난 10년 동안 우리의 전당, 우리의 대학이 어떻게 죽은 시대와 사당이 되어 있는가를. -중략-
학칙은 대학을 목졸라가고 우리의 스승과 학우는 왜 학원으로 돌아오지 못하는가!
투쟁은 갈수록 수위를 높여가며 박정희 정권을 위협하였다. 이와 함께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국민의 소리는 더욱 거세게 확산되었고, 야당까지 합세하여 개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정권의 안정적인 유지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자 박정희는 헌법을 초월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하였고 이른바 ‘긴급조치시대’가 시작되었다. 1974년 1월 8일에 제1호와 제2호가 처음 발동된 이래 1979년 12월 8일 제9호가 해제되기까지 만 5년11개월 동안 ‘긴급조치’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시기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고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였다.
 
2)유신에 맞선 농대학생운동
(1) 서막
긴급조치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철권통치로 국민의 숨통을 쥔 박정희 정권은 1974년 2월 12일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붙여 과반이상인 73%의 찬성을 얻어 유신헌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국민투표에서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정권은 긴급조치1호, 4호 관련자 중 인혁당과 민청학련 관련자 4명을 빼고 모두 석방하는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다. 1975년, 대학가의 봄은 석방학생들에 대한 복학여부를 놓고 정부와 팽팽한 대결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석방학생들의 무조건 복학을 요구하는 학생들에 맞서 정부가 복학불가 입장을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대학가는 석방학생 복교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고, 시위 또한 언론탄압 중지, 고문정치 원흉처단, 유신철폐, 등으로 확대되며 전국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2) 농대학생운동
3월 28일 서울대농대에서는 제1차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다. 농대의 본격적인 유신타도 투쟁의 서막인 이 날의 학생총회에서 농대생은 ‘제1차 대학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이어 4월 2일에는 농과대학 학생회 명의로 1차 때보다 표현강도가 센 ‘제2차 선언문’이 학내에 돌았다. 그리고 4월 4일, 제2차 비상총회가 열렸다. 활동의 폭이 좁아진 학생회를 대신하여 이념서클을 중심으로 개최된 이날 총회는 좀 더 정치적인 구호를 채택하고 3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1. 경제파탄에 따른 국민생활 보장하라.
2. 노동3권 보장 및 농어민 착취 중단하라
3. 중앙정보부를 철폐하라
4. 동아, 조선 언론탄압 중지하라
5. 유신체제 물러가라
이 날 총회의 요구는 한마디로 유신체제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원상회복하지 않는 한 투쟁을 멈출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또한 이 날의 시위는 교내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교외로 진출을 시도하여 수원 시내 한복판인 남문시장까지 진출하여 게릴라식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경찰은 곧바로 출동하여 최루탄을 발사하며 강경진압에 나섰고, 시위대와 경찰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날 시위로 학생회장 황연수(농경제72)와 체육부장 김명섭(축산72)을 비상총회 주동자로 지목하여 전격적으로 체포, 구속하였다.
농대의 투쟁이 가두시위로 발전하면서 경찰과의 공방전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4월 7일, 축산학과 비상총회가 열렸다. 이날의 회의는 김상진이 주재하였다. 이날 축산학과 비상총회는, 학장과 총장에게 구속된 학우들의 석방을 위해서 힘써줄 것을 촉구하는 공개장을 보내고, 이것이 거부되면 4월 10일을 기해 단식 투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김상진을 ‘축산학과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양심선언문
더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두움이 짙게 덮인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중략-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서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동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 민족사의 새날은 밝아오고 있다.
-중략-
우리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축산학과 4학년 김상진
서울대 농대의 유신타도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4월, 대학가 역시 연일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며 유신정권에 맞섰다. 4월 4일 연세대 학생 3,000여 명은 이화여대 교정 등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전개하였고, 4월 7일과 8일 고려대 학생들은 이틀에 걸쳐 독재정권퇴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며 가두진출을 시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또한 서울대는 4월 7일 전면휴강에 들어갔다. 이에 정부는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여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리는 한편 군인을 투입하여 진주시켰다.
(3) 영원한 청년 김상진(축산68, 2000년명예졸업)
1968년 서울대 농대 축산학과에 입학한 김상진은 이념서클 ‘한얼’에 가입하여 활발한 학내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군복무 후 복학하여 1975년 당시는 축산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유신타도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된 이 무렵 김상진은 ‘축산학과 대책위원회’위원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총장과 학장에게 구속학생 석방을 촉구하는 공개장 작성을 맡는 등 적극적인 투쟁 대열에 있었다.
운명의 4월 11일, 김상진은 서울대 농대 3차 비상학생총회의 연사로 나설 예정이었다. 이 날의 비상학생총회는 그 전날인 4월 10일 예정되어 있던 단식농성을 하루 연기하여 이루어 진 총회였다. 당시 농대학장(심종섭 교수)은 구속학생 석방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학생총회의 연기를 종용하였고, 학생총회는 대표회의를 개최하여 16일로 연기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11시부터 3차 비상총회가 전격적으로 개최되었다. 김상진은 연사로 나서기 전날인 4월 10일 밤 이미 할복의거 의지를 굳히고 있었다. 그는 당시 복학생들과의 잦은 모임에서 유신체제의 허구성을 성토하며 “이 경직된 사회는 젊은이의 희생을 요구한다.”고 토로하곤 하였다. 그리고 인혁당관계자 8명에 대한 사형집행에 대하여 뜨거운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 나라의 피 끓는 젊은이의 우국충정의 마음을 담은 글을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4월 10일 작성해 놓고 있었다.
양심선언문을 낭독 도중 김상진은 준비한 칼을 꺼내 할복하였다. 동료 학생들이 미처 손을 쓸 수 없는 지극히 짧은 순간에 그는 할복의거로 유신정권에 항거하였다. 할복의거 후 김상진은 학생들에 의해 수원도립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비상학생총회에 참가한 농대생 300여 명은 김상진의 할복의거를 마음에 묻은 채 교문 앞에서 경찰과 대처하며 투석전을 벌이고 농성에 돌입하였다. 오후 4시경, 농성중인 농대생들은 김상진이 미리 작성한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낭독하였다. 이후 농대생들은 입원비를 모금하는 한편 연좌농성을 계속하였고, 100여 명은 오후 7시경 333호 강의실로 자리를 옮겨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오후 9시경 강제해산을 당하였다. 다음 날인 4월 12일 농대는 휴교령을 발표하였고, 상록캠퍼스는 당국의 탄압과 김상진 추모 분위기 속에 모든 활동이 일시 정지되었다. 4월 12일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김상진은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도중 심한 출혈로 절명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김상진의 유해를 벽제 화장터에서 서둘러 화장하였다. 장례식은 물론 유족들로 하여금 임종조차 보지 못하게 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정부는 김상진 할복의거 한 달여 뒤인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고 이 땅을 암흑시대로 몰고 갔다. 이러한 폭거에 학생들은 물러설 수 없었다. 서울대 문리대 민속가면연구회와 사범대 야학문제연구회 등은 긴급조치 9호에 정면 대항하여 장례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반대행위와 학내집회 및 시위를 전면금지하고 있었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5월 22일, 학생들은 장례식을 강행하였다. 교직원과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원들의 제지로 난투극이 벌어지는 가운데 ‘장례 선언문’과 ‘반독재선언문’을 낭독하였다. 학생들은 장례식을 마치고 5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밖으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곧 해산되었다. 이날 시위에는 민중가요로 유명한 ‘농민가’가 대중적으로 불리면서 전파되었다. 지금도 시위현장에서 널리 불리고 있는 농민가는 농사단가이자 당시 농대 이념서클에서 자주 불리던 노래였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던 날
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진리를 외치던 형제들 있다”
 
농민가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삼천만 국민이 모두 잠들어 있을 때도 깨어 일어나 농민 형제와 새 역사를 함께 쓰자는 농대의 정신이 고스란히 표출되어 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 진행 과정에서 대중적으로 많이 불리기 전까지는 당시 농대에서만 불리던 노래였다. 그러던 것이 이 날 시위에서 처음으로 전파된 것이다. ‘5.22시위’로 불리는 이 날 시위로 학생 56명이 구속되었으며 그 중 24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책임으로 서울대총장이 사임하였고, 시위를 진압하지 못한 서울남부경찰서장과 치안본부장이 경질되었다. 5.22시위는 긴급조치 9호에 대항한 대학가 첫 시위였다. 이 후 대학가는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의 위력에 눌려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4) 그 후
긴급조치 9호는 학생운동에 대한 강경한 탄압과 함께 학원을 과거로 회귀시켰다. 교육관계법
을 개정하여 학생회를 해산하고 4.19 이후 사라
졌던 학도호국단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설치하는 한편, 교련교육의 강화와 확대, 지도교수제 강화, 경찰의 교내상주합법화 등 학원사찰을 날로 강화하였고. 각 대학의 서클을 모두 해산시켰다. 그러나 지하로 잠복한 학생운동 세력은 기층 노동자, 농민 등 민중역량 강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꾸준히 유신타도 투쟁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의 유신 반대 투쟁은 1978년 들어 더욱 고조되어 갔다. 농대는 1978년 3월 15일 유신독재반대 유인물 뿌리기를 시작으로 6월 1일 상록축제를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투쟁에 나섰다. 이 날 투쟁은 시국선언문낭독, 녹원사 옥상점거 등 경찰과 대치하며 공방전을 벌이는 등 긴급조치9호 선포 이후 가장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사건으로 주동자 3명은 제적되었고, 7명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굳건할 것만 같았던 박정희 정권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김상진의 말대로 역사의 한 페이지 위에 하나의 오점을 남긴 채 1979년 10.26사태로 불명예의 굴레를 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 보시기에는 너무도 지극히 미약한 인간이지만 진실로 국가를 사랑하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걱정하는 한 국민의 충성된 마음에서 탄원하옵니다. 각하께서는 71년도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전쟁준비를 완료하고 초조하게 무력통일의 기회만을 노리는 북괴가 이러한 정세를 오판한 나머지 또다시 6.25동란과 같은 참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앞으로, 2,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요한 시기가 될 것입니다.” 지난5,6년간에 걸친 안보위기 속에서 우리 국민은 무척이나 허덕여 왔고 매년 가중되는 강박관념은 오히려 불신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싸워나갈 수 있는 길은 올바른 민주주의 토대위에서 이룩된 국론통일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풍토, 이것이 곧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세력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각하께서 5.16직후 발표하신 혁명공약에서 민정이양을 선포하셨을 때, 우리 국민은 정의로운 혁명에 갈채를 보냈고, 삼선에 출마하셨을 때 우리 국민의 얼굴은 어두웠으며, 유신헌법이 공포되었을 때 우리 국민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감히 입을 열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아끼는 신념 속에서 살아가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만, 국민이 판단해서 행해 나가는 방법이 그룻되었다 할 때 그것은 한 지도자의 아집과 독선으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은 사회를 끝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게 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요?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건대 지극히 제한된 자유 속에서 울분을 감추며 그것을 인내로 이겨나가는 습성을 익혀왔고, 따라서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들의 마음속에는 이제 조그만 자유나마 감사하며 일제 강점기, 6.25당시와 비교하여 획득해야 할 자유를 포기해 버리는 피압박 민족의 설움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인내를, 그 무언의 호소를 각하께서는 소리 없는 지지로 착가하셨고 14년여의 권위를 유지해 온 힘이 되신 것입니다. 획득해야 할 자유에도 한계가 있지만 제한해야할 자유에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주위를 돌아보아야하고, 보이지 않는 압력에 끌려 투표장으로 가는 국민의 발걸음에서 과연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사회는 어둠의 짙은 그림자가 뒤덮이고 학원은 병들어 교수는 학생에게 양심과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치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아직도 계속되는 학원사태가 일부 몰지각한 학생의 선동이라 생각하십니까? 각하께서는 아직도 현사회의 각 분야에서 어떤 희생도 불사하고 과감히 투쟁의 대열에 서서 소리높이 외쳐대는 절규가 일부 분수를 모르는 사회인사의 망언이라 생각하십니까? 부패와 부조리가 난무하는 우리 사회이지만 그래도 순수한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양심적인 입장에서 반항이나마 할 수 있는 곳이 대학입니다. 대학인은 사회와 국가가 해결해야하는 근본문제를 알고 있으며, 그러기에 현실의 제 문제에 민감히 반응하여 자신의 양심의 결정에 의한 행동을 서슴없이 행해 나갑니다. 그것은 자신의 희생을 애국애족적 견지에서 받아들여 만족해할 수 있는, 즉 대학인이 가지는 국가의 비전에 대한 사명의식에 기인하는 부담없는 순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학생들의 진심에 귀를 기울이려 하시지 않고, 왜 그들의 순수한 애국을 외면만 하는 겁니까? 이렇게 죽음을 불사하고 양심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행동하는 저도 시국을 판단할 줄 모르는 몰지각한 학생일까요?
저는 저의 생명을 그렇게 값없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게 몰지각한 행동으로 생명을 버릴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죽음 앞에서 인간이 하고자 하는 말에는 고려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선 보다 순수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대통령각하,
위대한 지도자는, 또 민족의 영도자는 국민의 열망과 진심에서 우러나는 존경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결코 강요와 복종으로 점철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민심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각하 혼자서만 이 시국과 이 나라를 이끌어갈 유일한 존재이며 이 조국의 안녕과 민족 번영을 위해 각하만이 중차대한 사명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오류를 버리지 못하는 겁니까? 우리 국민은 누구나 밝고 밝은 내일의 비전을 갈망하고, 우리 국민은 누구나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 사회의 이유 있는 저항을 각하의 독선 속에 파묻어 버리시려는 것입니까? 헌법 전문에 나타나 있듯이 우리 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이어받았고, 그래서 용납할 수 없는 불의에 항거하며 어떤 희생도 불굴의 의지로 대항해 나갈 줄 아는 슬기와 용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느껴야 할 기본적인 양심이 무엇이고, 사회가 추구해야 할 정의가 무엇이며, 민족이 획득해야 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우리 국민은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각하
위대한 지도자는 진정한 용기는 영광의 퇴진을 위한 숭고한 결단에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진정한 안보는 국민총화에서 비롯되고 국민총화는 지도자와 국민사이에 불신과 압박이 없을 때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불신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 개인에게 이유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무엇을 뜻한단 말입니까? 각하의 숭고한 결단 하나로 사회의 안녕을 가져오고 학원의 평화가 유지되며 진실로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리 민족에게 국민총화의 계기를 마련해주며 단결된 힘으로 뭉친 안보태세의 만전이 가해지리라 믿는 바입니다. 길이 민족의 가슴속에 각하가 이룩해 놓은 업적과 더불어 참된 지도자로 새겨질 것이며, 욕망을 초월한 초인간적인 슬기를 역사는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역사의 방향을 잘못 인식한 위정자는 산 경험이 말해 주듯이 언젠가는 역사의 한 페이지 위에 하나의 오점을 남긴 채 불명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저 민족의 들리지 않는 피맺힌 절규가 무엇을 뜻하며, 간절한 무언의 호소가 무엇을 바라는가를 왜 각하는 모르시는 것입니까?
죽음으로써 바라옵나니, 이 조국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바라옵나니, 국민 된 양심으로서 진실로 엎드려 바라옵나니, 더 이상의 혼란이 오지 않도록 숭고한 결단을 내려 주시길 바라옵니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떠한 압력에도 끝없는 투쟁을 계속하여 싸워 이겨 나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각하의 안녕과 건강을 축원합니다.
1975년 4월 10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과 4학년 김상진
선배님을 기리며
시퍼렇게 살아있는 권력에 대항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농대 학생회 멤버들과 축산과 후배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자, 축산과 복학생 4명이 “이제 우리가 나서서, 잡혀간 학우들을 석방시키고 민주주의를 쟁취하자.”고 결의했지요. 형님. 아, 그때 내가 “왜? 죽자”는 말을 꺼냈을까 후회합니다. 원래, 우리는 간디처럼 단식을 통해, 죽음을 각오하고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형님이 번득이는 그것을 내보이시며,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이라 하실 때 ,저는 설마 거사를 실행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형님이 경기도립병원으로 후송되자, 우리는 농대 강의실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죽음을 각오하고, 장기전에 들어갔지만 교수님들의 피눈물 어린 만류와 더 큰 희생을 막으려는 학교의 배려로 며칠 못가 그만 해산되었지요. 우리 후배들은 지금도 두 눈을 크게 뜨고 ,형님이 목숨으로 바꾼 뜻을 계승하기 위해 열심히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김영호(축산70)
가지 않은 길
1970년대 중반 이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졸업생에게 김상진 선배는 잊힐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된 이후에도 그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공개된 바도 없었기에 김상진 열사가 목숨을 바치며 주장했던 그의 뜻이 제대로 알려지지도 알지도 못하였고 각자의 견해에 따라 그를 폄훼하거나 특정한 견해를 대변하는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갈등이 심화될수록 국민은 물론 동문들에게 조차 그의 정신이 잊혀져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모교에서 근무하는 저는 교정에 있는 그의 추모비 앞에서 양심선언문을 자주 읽게 됩니다. 저에게 있어 그의 삶은 R. Frost가 노래한 “가지 않은 길”입니다. 어느새 저는 김상진 열사보다 수십 년을 더 살면서 이후에 펼쳐진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양심선언문에서 그는 학생들의 처지를 “어미닭을 잃은 병아리”라고 표현하였고 민주주의는 시민혁명의 대가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고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유신정권에 저항할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하지만 양심선언문은 그의 역사관이나 정치관을 알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읽으면서 제 궁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그 글에서 그는 남북대치 상황을 비롯한 근현대 역사에 대한 그의 이해, 대통령이 착각하는 점, 대학의 역할, 헌법 전문의 기본정신과 국민들의 여망을 설명하고 대통령이 하야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력통일의 기회를 노리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생각한 분이었습니다.
모든 동문들이 김상진 열사가 작성한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읽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판단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의 뜻과 정신을 폄훼하거나 독점하지 말고 국민적 민주주의 영웅으로 부활시키는 것이 불가능할까요? 그의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를 바래봅니다. 그의 삶이 제게는 “가지 않은 길”이지만 비록 저 세상에서나마 그가 기뻐할 수 있도록 그가 소원한대로 민주주의를 꽃피우는데 국민으로서 상록의 아들로서 맡은 임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이중용(농공77,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 교수)
열사가 의거한 지 13년이 지난 1988년 11월, ‘김상진기념사업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여 묘소 정비, 각종 유적 ·유물 보존, 평전 발간 ·보급, 장학사업, 학술 문화, 예술 등 제반 기념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기념사업회의 목적에 부합하는 동문들의 글을 모아 소식지(제호: 선구자)도 110호 째 발간해 오고 있으며 민주주의 질서를 뿌리내리고자 활동하는 각종 시민단체와 연대활동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상진 열사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이천에 민주화운동 기념공원에 이장되어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의에 저항하며 의롭게 살다간 의인을 기념하는 일은 억울한 죽음을 접한 유족을 위로하고 그 죽음의 의미를 동문들과 함께 기억하고자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역사의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열사의 숭고한 양심의 소리가 이 땅에 항구히 실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김상진기념사업회는 그동안 제1대 안종건(축산68) 회장으로 시작하여 현재 제가 4대 회장을 맡아 29년의 시간동안 약 700여명의 회원 동문의 관심 속에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동문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사)김상진기념사업회 회장 정근우(농화학84)
*그 날, 그 사건, 그리고 우린. (동문 소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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