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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 不狂不及” 한국문학의 세계도약에 주력하는 문인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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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1-08 10:31 조회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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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狂不及” 한국문학의 세계도약에 주력하는 문인CEO, 제7대 동창회보 편집인
국제PEN클럽 한국본부이사장 손해일(잠사67)
*2017년 3월말 국제펜클럽 제35대 한국본부이사장에 선출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국제펜클럽에 대한 소개 말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4년간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치열한 3파전 직접선거 끝에 회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어 3월말 취임했습니다.
PEN클럽이라고 하면 아이돌 가수나 연예인의 팬클럽이나 펜팔클럽 정도로 아시는 분들이 많아요. 국제PEN은 세계 유일의 국제문인단체인데 P(Poet 시인, Playwright 극작가), E(Essayist 수필가,Editor 편집자), N(Novelist 소설가)의 이니셜을 딴 것입니다. 국제PEN클럽의 설립목적은 PEN헌장에도 나와 있지만 국가 간의 상호 문인교류, 정치권력으로부터 억압받지 않는 표현의 자유와 소수언어 보존 등을 추구합니다. 국제PEN은 1921년 영국 런던에서 여류 소설가 도슨 스코트의 제창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존 골드워디를 초대회장으로 창립되었습니다. 현재는 전 세계 154개의 펜센터로 확대되었고, 한국도 그중 하나입니다.
한국PEN은 6,25직후의 폐허속에서 1954년 9월15일 창립되었고, 1955년 비엔나 세계 회에서 인준받기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지원과 모윤숙 선생의 공이 컸습니다. 초대 변영로 회장부터 정인섭, 주요섭, 모윤숙, 백철, 전숙희, 문덕수, 김시철, 성기조, 문효치, 이길원, 이상문 이사장을 거쳐 제가 13번째인 35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PEN회원 자격은 국적, 언어, 인종, 종교를 불문하고 저작물을 출간한 작가여야 되는데, 한국PEN 정회원은 등단 5년이상, 본인 저서 1권이상인 문인으로 심의를 거쳐 입회합니다. 현재 한국PEN은 국내외 19개 지역위원회에 3,800여 명의 회원이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매년 공식적인 노벨문학상 추천권이 154개 각국 PEN센터에 있으며, 한국PEN도 그 중 하나라는 점입니다..
 
*펜클럽이 역사도 오래되고 세계적인 파급력도 크고 국내 회원수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사장으로 취임하셨으니 큰 목표나 계획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펜클럽 이사장으로서 내건 공약은 첫째로 한국문학의 세계도약, 둘째로 한국 PEN의 해외홍보강화, 셋째, 회원들의 권익 향상, 넷째, 조직쇄신, 다섯째 국제PEN 회원간의 교류증진입니다.
첫째인 한국문학의 세계 도약을 위해 <PEN번역원> 신설을 중점 추진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에서 보듯이 작품 번역의 중요성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문학작품이 결코 세계수준에 뒤지지 않음에도 노벨문학상을 못받는 등 저평가된 측면이 있습니다. 작품 번역이 미비하고 세계 독서시장에 대한 유통과 홍보부족, 체계적인 정부지원 시스템부족 등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한국문학 세계화의 일환으로 제가 주관하여 5억원의 정부 지원금을 받아 6개월을 준비한 끝에 제3회 세계한글작가대회를 경주에서 9월12일부터 4일간 연인원 3천명 정도가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그중 약 500명의 기념문집으로 회원들의 대표작을 모아 한·영 대역으로 시집(714페이지), 산문집(588페이지), 영문판선집(300페이지)을 발행했습니다. 이는 한국문학세계화의 초석으로 한국PEN 창립 이래 초유의 일입니다. 앞으로 노벨상추천권이 있는 각국 PEN센터는 물론 대사관, 영사관, 도서관, 큰 서점 등에 두루 배포할 예정입니다. 9월18일부터 일주일간은 우크라이나 리비브에서 개최된 제83차 세계PEN총회에도 참석해 한국PEN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국내문인과 시민들을 위해 서울시내 문학투어를 매년 8회 정도 해오고 있습니다. 기관지인 PEN문학은 격월간으로 6회 발간하고 있으며 앞으로 15년간 못고친 정관개정과 지역위원회 개편 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1978년 ‘시문학’으로 등단을 하셔서 문인으로 40년 정도를 지내셨습니다. 어떤 연유로 문인의 길을 걷게 되셨는지요?
저는 전북 남원에서 2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는 곧잘 해서 고향에서는 수재라는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와 예체능에 두루 소질을 보였는데, 그 중에 몇 번의 백일장 장원의 경험이 저에게 기쁨과 보람을 주었습니다.
특히 어릴 적부터 아동도서는 물론 세계문학 전집, 역사서적 등 어른들이 읽는 책을 뜻도 잘 모르면서 닥치는 대로 읽는 독서광이었어요. 당시 시골에는 워낙 책도 귀하고 책살 형편도 안 되다보니 학교 도서관 책은 물론이려니와 중학교 짝궁 부친이 운영하는 시내 서점의 책들까지 많이 빌려다 읽었습니다. 대학재학중에도 전공 외에 4년간 약500여권 목표로 책을 읽었습니다. 돌아보면 학창시절 다독 남독한 경험이 문인으로서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문학에 본격 입문한 계기는 그동안의 소소한 습작을 계속하던 중 서울대학보 대학문학상 공모에 졸시 <꽃불>이 뽑히면서 용기를 얻게 되었지요. 대학 졸업후 농협에 입사해서 홍보실 농민신문 기자로 근무할 때에 마침 박목월 시인이 『육영수여사』 전기를 우리 신문에 연재했는데, 제가 담당기자로서 1년 반 정도 원고를 받고 고료를 전달하느라 매주 목월 선생을 뵈었지요. 그 인연으로 매번 첨삭지도를 받고 『현대문학』에 추천도 약속받았는데 목월선생께서 그 전에 작고하시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현대문학』의 자매인 월간 『시문학』에 1977년 1차 추천에 이어 1978년 6월호에 <빛을 위한 탄주>가 문덕수, 이석 선생의 2차 추천되어 등단했습니다. 우연히도 목월선생과의 인연은 1995년 저의 부친 묘소를 우연히도 목월선생이 안장된 용인공원 약200미터 거리에 모시면서 사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농민신문 편집국장과 농협대학교수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재직 당시에 주로 하셨던 일을 말씀해 주시고 특히 기억나는 일이 있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재학중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 1975년 2월 대학을 졸업했지만 오일쇼크로 취직난이 극심했습니다. 다행히 그해 3월 농협중앙회 3급 중견간부 공채에 합격하여 평생직장으로 근무를 하였습니다. 비교적 안정된 직장이고 전공과도 관계되는 농협이라 농민·농촌 봉사라는 사명감과 보람으로 봉직했습니다. 워낙 방대한 조직이다보니 30여 년 간 농촌 현장근무, 농협조사부 리서치업무, 농협지점장, 농민신문사 편집국장, 농협대학교수 등 직업을 바꾸지 않고도 한 직장에서 다양한 업무를 할 수 있어 체험의 폭이 상당히 컸습니다. 문학단체장에 필요한 조직관리, 인사관리, 재무관리, 대외섭외 등 실무능력을 재직중에 자연스럽게 배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재직 중에 틈틈이 창작을 하고 8년간 주경야독으로 홍익대학에서 문학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축복이었지요. 농협대교수로 강의와 보직을 겸하고 홍익대 출강 등을 병행하느라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직장일과 문학을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한 결과가 문인의 최고봉인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 당선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봅니다.. 유능한 문학단체장이 되려면 품격있는 작품세계와 조직경영 능력을 겸비한 문학CEO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농협중앙회 조사부 8년 근무중 1984년에는 약1년간 일본 쓰쿠바에 파견 연수를 받을 때도 많은 외국인들과 교류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인생의 폭도 넓힐 수 있었습니다. 1978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남북시동인 활동과 시문학회장, 홍익문학회장, 서초문인협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등 여러 단체장을 역임하며 작품창작과 평론도 병행하였습니다.
농협당진군지부, 파주군지부, 인천시지회 등에서 현장근무와 농협중앙회 조사부, 농협대교수를 거쳐 농협부산지회에서 지점장, 농민신문 편집국장, 논설실장, 논설고문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만34년 만에 농협중앙회를 정년퇴임했습니다. 평생직장인 다양한 분야 종합농협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글을 쓰거나 일상 생활의 마음가짐은?
인간의 영혼을 살찌우는 문학은 예술의 꽃이요 그중에서도 시가 으뜸이라고 봅니다. 바쁜 직장생활의 와중에도 부족한 제가 문학을 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문단지도자가 된 것도 큰 행운입니다. 무언가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역경도 극복 대상입니다. 문학이나 삶이나 매사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성공한 사람이나 위인들에 비하면 평범한 인생입니다만 ‘진인사대천명’하고 ‘지성이면 감천’으로 각자의 삶을 밀도있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과 인생에 대한 열정을 원동력으로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려면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치열함이 필요한데 저는 아직도 한참 멀었지요..
 
*자작시집, 평론집, 번역시집 등 많은 작품집들이 출간이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 세계와 자작시 중에서 가장 아끼는 시는 무엇인지요? 그 이유는?
초기에는 <벌거숭이의 노래> <흐르면서 머물면서>류의 인간의 원초적 감성과 본성을 추스르는 서정시를 썼습니다. 그러다 <독도>를 기점으로 백제석학이며 일본 문화의 원조로 추앙받는 왕인박사의 도일 행적을 추적한 연작시 <왕인의 달>을 썼고, 히로시마 원폭투하의 전말을 추적한 500행 다큐멘터리 서사시 <그날의 핵십자가 >등 역사의식에 경도되엇지뇽 으식에 심취했었지요. 의식으 도 썼습니다. 최근에는 유머해학 풍자시 <떴다방 까치집>을 비롯해 물고기의 생태와 포구풍경 등을 현장 취재한 다큐 포엠으로 <新자산어보>를 발간했습니다. 대체로 재미있고 유익하다는 평입니다. 현대시가 너무 엄숙하고 난해하여 독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재미와 교훈, 지식정보까지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생각해요. 제 작품에서 굳이 한편을 고르자면 1984년 일본 체험후 쓴 <독도>시가 어떨가요.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일제 만행은 여전하기 때문이죠,
 
*신문형 동창회보 제작에 많은 기여를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또한 향후 동창회보 제작에 도움이 되는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서울농대 동창회일에 적극 참여한 것은 윤근환 동창회장이 2005년 창간한 타블로이드판 신문형 16면 동창회보 취재, 편집을 혼자서 전담하면서입니다. 마침 농민신문사를 끝으로 농협을 퇴직한 때라 동창회보를 맡게 되었는데 년간 4회 발간했습니다. 윤근환 동창회장에 이어 한인규 동창회장때 현재의 잡지형태로 바뀌기까지 약3년반 정도를 제가 취재 편짐을 전담해 동분서주했지요.
타블로이드판 시절에는 각대학 동창회보를 제작 대행해오던 한우리정보사에서 맡았지요. 농대동창들의 광고협찬을 조건으로 한우리정보사에서 동창회보를 무료제작후 발송도 해주고 오히려 동창회에 매호 3백만원씩인가(?)를 협찬받는 유리한 조건이었지요. 그러나 오로지 광고로 제작비를 충당해야 하는 업체입장에서는 동창회를 빙자한 집요한 광고섭외 때문에 동창회 이미지를 실추시키기는 폐단도 컸지요. 16면중 업체의 광고섭외가 펑크날 때에는 마감 임박해서 긴급하게 제가 기사로 채워야하는 고충도 많았어요.
워낙 일을 철저히 하시는 한인규 동창회장때 동창회보는 물론 동창회원 명부정리, 업무매뉴얼 작성, 동창회원들 모금으로 ‘상록탑’건립, ‘명예의전당’ 설립, 상록문화재단 설립 등 동창회 기틀이 잡혔다고 봅니다. 동창회 발전 과정에서 각종 실무위원으로 저도 일조한 보람을 느낍니다.
그후 신문형에서 현재의 잡지형 동창회보로 바뀌면서 가독성이나 보관은 좋아졌지만 회보제작과 발송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단점은 감수해야겠지요. 그럼에도 전국 각대학중 우리동창회보가 단연 돋보여 자랑스럽고 현 편집진의 노고도 치하드립니다. 세계를 아우르는 자랑스러운 모교 동창회로 거듭 발전하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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