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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 그리고 상록의 아들 | 서둔 4년이 졸업후 44년 삶의 주춧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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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2-26 11:50 조회1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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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 그리고 상록의 딸
서둔 4년이 졸업 후 44년 삶의 주춧돌
순천대학교 명예교수 박옥임(농가정70)
 
나의 이야기
대학 4년이 아름답고 빛나는 청춘의 전성기라면 졸업 44년이 된 지금은 제2의 전성기인 황혼기이다. 철없던 한 때 동창회 나오라고 하면 왠지 부담스러웠다. 젊은 시절에는 직장 일과 자녀교육에 여유없이 살다 보니 나중에 나이든 다음에 가겠다고 하였었다. 그랬더니 선배 말씀이 ‘동창회가 뭐 경로당인가?’ 하면서 핀잔스레 서운함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지역 동창회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니 벌써! 이제는 내 나이가 은퇴하여 경로 우대가 적용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 시골뜨기가 대학에 오니 모든 것이 생소하고 새로워서 좋았다. 입학이 1970년이니 학번이 70555이다. 번호가 좋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입학할 때 농과대학 정원이 330명이었으니 정말 오붓한 규모였다. 어지간하면 대체로 누구인지 알고 지내는 정도로 친밀한 편이었다. 입학 당시는 갓 세수한 풋풋한 얼굴처럼 앳된 동기들이 이제는 중후한 나이를 넘어 건강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니 세월의 흐름이 쏜 화살같이 지나가고 있어 매우 아쉽다.
 
그러나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면 서둔의 4년 배움이 졸업 후 44년 삶의 주춧돌로 지탱해 주었다. 직장이 아무리 국립대학이고 교수 신분이어도 미미한 권력으로부터 사람을 회유하거나 굴복시키려는 우여곡절이 없지는 않았었다. 고민하고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겸손하면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붕(大鵬)의 뜻을 함부로 굽힐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명분이 없는 선택은 결코 하지는 않았다. 상록의 딸로서 서둔에서 가꾸고 닦은 투지로 자유의 젊은 날개처럼 살아왔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앞으로 44년을 더 산다고 해도 이 점에서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일 것이다.
 
지금부터 생각나는 대로 옛 추억을 되새김 해 본다.
 
우리의 이야기
입학시험은 서둔 캠퍼스였는데 1학년 때는 교양과정부라 하여 서울대 전체 입학생을 옛 서울공대인 공릉동에 전부 모아놓았다. 공릉동의 춥고 매서운 바람은 남도출신에게는 살을 에는 바람처럼 날카로웠다. 그런데 2학년이 돼서 수원에 내려오니 이제는 웬 걸! 귀를 멍멍하게 하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쌕쌕이의 소음은 더 지독했었다. 그래서인지 어지간한 복잡하고 어려운 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제껏 견디어 냈나 보다.
 
시력이 학점보다 더 좋은 사나이들
아! 지금 생각해봐도 교양과정부의 학점은 왜 그렇게 짰는지, 1학기를 마치고 집에 날아 온 성적표와 안내문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섬머스쿨(summer school)을 다녀야 할 수준이었다. 창피를 무릅쓰고 학교에 왔더니 놀랍게도 수많은 학생들이 “너도? 너도?” 하면서 무척이나 반가워들 하였다. 서울출신이나 지방출신이나 도토리 키재기였나보다. 그래서인지 학생회장은 1학년 성적이 평균 B학점 이상이어야 하는 자격조건에 맞는 우리 학년 남학생은 딱 3명뿐이었다고 한다. 이 섬머 스쿨을 그래도 창피하게 여겼었던지 나중에는 매학기 학점이 3.75이상을 우등생이라 하여 이름 석자가 계속 대학신문에 올라있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학과 성적보다는 농대 마이티(mighty)에 치중한 남학생들은 졸업 때 ‘시력이 학점보다 더 좋은 사나이들(?)’이라는 별명도 얻은 몇 명의 남학생들도 있었다.
 
유신시대, 2학기는 없었다.
70학번인 우리들은 졸업할 때까지 2학기 강의는 한 달이나 겨우 했을까 말까였다. 2학년 때도 교련반대 데모는 계속되었는데 농심(農心)이 강한 농대생들의 구호는 최루탄에 눈물·콧물이 범벅되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앞에서 누군가가 “최루탄 아껴 써서, 경찰 봉급 올려주자!” 하고 선창하면 반대쪽에 대치하던 경찰들이 “옳소! 옳소!”하고 화답하는 웃지 못하는 장면도 있었다. 도랑 수준인 수원의 미라보 다리와 세느 강 앞에서의 데모는 그렇게 흘러가는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1971년 4월에는 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많은 대학생들이 공명선거감시단으로 참가하였고, 개교기념일인 10월 15일 서울대 종합운동장에서의 체육대회 날 위수령이 발동되어 대학은 문을 닫았다. 군인들이 교문에서 대학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하였고, 남학생 기숙사인 상록사와 여학생 기숙사인 녹원사를 바로 폐쇄하였다. 학생들은 책 보따리와 이불 보따리를 싸들고 집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3학년 때인 1972년에도 어김없이 10월 유신체제로 들어서면서 역시 2학기는 강의 없는 학기로 이어졌다. 4학년 2학기도 유신헌법 이후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과 학생들의 열망으로 강의는 1달 정도 밖에 못 받았으니 2학기 수업일수 부족으로 졸업을 시키네 마네 하면서 끝났 었다. 결국 대학 4년 내내 2학기는 거의 배움 없이 보낸 셈이었다. 아! 황금과 같은 대학생활 중 2학기를 거의 그렇게 마쳤으니 지금 생각해도 무척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우리 세대 모두는 ‘되로 배워 말로 풀어먹는’ 저력이 있어서 사회에 나와서 열심히 부지런하게 살았다고 자부한다. 어쩌면 대학의 절반을 강의가 없는 홈 스터디(home study)만 했었고 이 때 못했던 공부를 평생 동안 채워 나가야하는 우리 세대가 바로 진정한 평생교육의 주체자가 된 것이다. 일평생 대학에서 학생들을 교육하고 연구하는 교육현장에서 깐깐하다 할 정도로 열성을 다하려고 했던 점도 이런 경험의 반영인 것으로 생각해 본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작년에 7년 선배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선배님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혼신을 다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혼자서만 열심히 한 것처럼 옹졸한 자만심도 접게 되었다.
 
70학번 딴따라의 도래
그렇다고 암울한 대학생활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정치는 어두운 독재정권이었지만 그 안에 있는 청춘들은 낭만도 넘쳐 있었고, 치기어린 젊음도 살아있어 빛을 발하기도 했다. 우리 70학번이 수원으로 내려오니 선배들 말씀이 ‘놓아먹인 말’처럼 제멋대로고 버릇이 없는 애들로 못 마땅하게 여겼었다고 한다. 게다가 조용하던 캠퍼스에 소위 딴따라라는 70학번 남학생 5명이 샌드 페블즈(Sand Pebbles)를 조직하여 한국의 연예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지금도 그 맥이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순수한 학생 밴드 동아리로서 나중에 관료나 교수, 사업가로 대다수 성공한 동기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1972년 4월 1일자로 수원-여주간 협궤 열차가 폐쇄된다고 하여 우리 학년 100여명이 땡땡이를 치고 차량 2칸뿐인 열차를 거의 전세 낸 듯이 공짜로 갔다 오면서 ‘선구자’나 ‘아침 이슬’ 등을 목이 터져라 불렀었다. 우리를 제외한 승객은 불과 몇 분이었는데 귀엽다고 여기신 듯 미소만 띠고 있었다. 그날이 3월 31일인데도 눈발이 엄청 굵은 함박눈까지 펑펑 쏟아져서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낭만을 즐겼던 셈이다.
 
녹원사 OPEN HOUSE
대학생활이 아름다운 추억이 넘쳐나는 것은 누가 무어라 해도 기숙사 생활의 영향이 무엇보다도 컸었다. 연례행사인 상록사 Open House보다 수원 캠퍼스가 더 들썩였던 것은 녹원사 Open House였다. 상록사는 규모 자체가 커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여학생들의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녹원사의 경우는 누가 초대 받았느냐에 남학생들의 촉각이 모아졌다. 그 날에는 남학생들이 신사처럼 양복에 흰 Y셔츠에 넥타이 매고 손에 선물꾸러미 들고 등장하였고, 여학생들은 방에 꽃도 꽂아 놓고 향수도 뿌리고 다과도 마련하는 등 부산한 하루였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녹원사 4각 잔디밭의 카니발이었다. 잘 차려입은 선남선녀들이 여학생들이 밤 새워 만든 예쁜 카나페(canape)며, 영양가 만점이고 맛이 뛰어난 샌드위치는 물론이고, 보기 좋게 담아놓은 색색의 과일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흥겨운 음악에 얼마나 즐겁게 보내고 유익한 담소는 각자의 몫이었다. 물론 여기에 초대받은 남학생들은 재학생도 그렇지만 복학생들에게는 잊지 못 할 추억거리로 남아있을 것이다. 기왕 나온 말이지만 이 포크 댄스의 인연으로 평생 해로하는 동문들도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현모양처, 커리어 우먼으로
그 당시만 해도 사회분위기 자체가 여학생 교육은 전문가를 양성하는 커리어 우먼(Career Woman)과 현모양처에 비중을 두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생활관 실습에 한복을 입었고 사은회는 물론 졸업식장에서도 한복을 꼬박꼬박 입었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집단급식이라는 과목은 매주 수요일 오전에 4시간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농대 교수회의가 수요일 오후여서 우리의 실습은 재료가 최고급임은 물론이고 굉장히 원활하게 시간에 꼭 맞추어 해 냈던 경험이, 나중에 집안 종손 며느리로 집안 행사나 시제(時祭)때 걱정도 하지 않고 잘 치러내는 능력도 대학 때 해 보았던 실습 덕분이었던 것이리라. 누가 무어라 해도 모든 상록의 딸들은 인성은 물론이거니와 재능과 능력이 아주 출중하였다는 점이다. 현모양처형의 선·후배들은 가족구성원의 성공과 성취에 기쁨을 누리고 부러움을 샀으며, 현직에 있는 커리어 우먼들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자리하여 동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더욱 분발하려는 각오를 다지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때 아니면 언제 한복을 뽐내고 입을 수 있었단 말인가. 자녀 혼사 때나 회갑, 칠순 등이 아니면 입을 기회조차 없었으니 그나마 화려한 한복과 젊고 발랄했던 젊은 날의 사진을 보면 마냥 좋았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잊을 수 없는 상록의 듬직한 나무
그러나 상록의 딸로서 가장 잊지 못 하는 것은 교문에 들어서면 크고 우람한 자세로 우리들을 맞이해 주던 아주 잘 생긴 나무들이다. 어떤 때는 그 나무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준다는 느낌도 느끼게 했지만, 어떤 때는 ‘너희들도 나처럼 꿋꿋하고 씩씩하게 자라야 해!’ 하고 당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혼자 큰다는 것 자체가 힘들고 외로운 일이다. 나무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함께 하고 도와주며 지지해 주는 든든한 상록의 선·후배들이 항상 옆에 있어서 우리는 많은 힘을 받고 있다. 어느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때 묻지 않는 고민과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던’ 서둔 캠퍼스의 청춘과 젊음이 삶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지 빛을 발하는 자랑스러운 상록의 딸들은 젊은 날개처럼 지금도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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