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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농진청이 배출한 든든한 농촌진흥청장, 농진청의 영원한 맏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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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2-26 10:54 조회1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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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에 31년간 재직하시면서 농촌진흥청장으로 퇴임하셨는데 재직 당시의 주요 활동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농촌진흥청은 농업연구와 농민에 대한 기술지도 및 보급을 하는 기능을 가진 기관입니다. 이 두 기능을 모두 함께 가진 기관은 세계에서도 드뭅니다. 연구와 지도기능이 같이 있어서 연구의 결과를 바로 현장에 지도하여 보급하다보니 상승효과가 큰 거지요. 진흥청장으로 제가 한 일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몇 가지를 꼽자면 먼저 인사제도의 개혁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연구직 관리의 최고직책은 과장이었는데 1인이 보통 10년을 훨씬 넘게 해당 직을 수행할 때인지라 연구의 활력이 떨어지고 인사정체가 되었습니다.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여러 번의 회의 끝에 과장의 임기를 5년으로 단축하는 것을 관철시켰습니다. 당시로서는 정말 그 결과를 이끌어내기가 힘들었는데 요즘은 행정직권이 강화되어 인사행정이 더 수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연구에 활력을 주기 위한 불가피한 결단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진흥청의 홍보에 신경을 쓴 점입니다. 농촌진흥청이 하는 일도 방대하고 연구원도 많으며 그 업적도 많건만 농진청이 ‘농업진흥청’인 줄 오해하는 이도 있을 만치 잘 알려지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하는 일의 중요도에 비해서 그 위상이 낮다는 인식하에 홍보를 해서 많이 알려 그 위상을 제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방송국과 연계하여 주기적으로 알리고 소속잡지를 발간하는 등 홍보에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국제교류의 확산을 위해 KOICA(국제협력단)와 연계하여 개발도상국들에 우리의 선진농업기술을 지원하고 퇴직자를 파견하여 교육을 하는 등, 외교부 이상의 외교활동을 하였다고 자부합니다. 또 국가 농업생명공학기술프로젝트인 ‘바이오그린21’사업을 추진시켜 예산을 확보하여 농업생명공학연구에 투입하고 전국적으로 관련대학교수를 초빙하여 연구과제를 선정하는 등 미래농업을 위해서 연구를 질적으로, 양적으로 모두 향상시키는데 기여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 동창회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신 것 같습니다. 특히 동창회 60주년을 기념하며 명예의 전당 헌정자를 선발하는데 있어서 포상위원장을 맡아서 많은 수고를 하셨는데 그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60주년 기념사업으로 ‘명예의 전당’을 만들기로 하고 포상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서 헌정자를 선정하였습니다. 학문 외 분야에서도 많은 동문들이 사회에 공헌을 하고 업적들이 대단하신 분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추천이 되지 않아 첫 해에는 헌정할 수가 없어 주로 농학자 위주로 선정을 하였으나 그 다음 해에는 산업계와 기타 분야의 인물들을 많이 발굴하여 헌정을 하였습니다. 이미 타계하신 분을 선정하기 위해 평가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아직 생존한 분들을 헌정자로 선정하는 과정은 마냥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시 동창회의 여러 사정 상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 농학과 농업분야의 뛰어난 인물들의 자랑스럽게 여길 공간을 만드는데 일조한 것 같아서 마음이 뿌듯하군요. 앞으로 더 많은 훌륭한 인물들이 명예의 전당을 메우기를 고대합니다.
 
우리나라 농업이 70년대 식량자급에 큰 기여를 하였으나 차츰 첨단산업에 밀려 사양산업으로 치부된 지가 오래입니다. 그러나 2016년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 화두로 제시되는 등, 바야흐로 기술융합의 시대를 맞아 우리 농업이 재주목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미래의 농업이 가야 할 바에 대한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현재 우리는 FTA 체결 등으로 농업여건이 날로 악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만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농업에 활력을 주기위한 기술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장기적으로는 지구의 이상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가 식량이 남아돌고 있지만 세계적인 식량난을 대비하여 획기적이고 차원 높은 연구를 통하여 우리 농업이 다시 한 번 산업계의 주목을 받는 시대가 도래할 수 있도록 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꼭 그렇게 되어야하고 지금 그렇게 조금씩 변화를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906년 권업모범장을 시작으로 하여 1962년 농촌진흥청으로 발돋움을 하였고 그 산하에 국립농업과학원, 국립식량과학원,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국립축산과학원 등의 4개의 연구원이 있는 방대한 조직과 긴 역사를 자랑하는 농촌진흥청이 수원시대를 마감하고 전주혁신도시로 이전한 것에 대한 소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중앙정부분산정책의 일환으로 농촌진흥청이 전주혁신도시로 이전을 하였지만 국가 중앙기관이나 국회 등 관계기관과의 협의 등을 할 때마다 원거리 출장이 비일비재하고 기관장이 관계기관과의 회의를 위해 자주 자리를 비워야 되는 등 아쉬운 점이 있으나 전주혁신도시의 넓고 좋은 부지의 신청사, 그리고 넓은 실험농장과 최신 연구시설과 연구원들의 복지증진 등으로 인해 연구개발력은 향상될 소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도쿄농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유학 중 감회 깊었던 일이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박사학위 유학 중이던 1977년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식량자급을 달성한 뜻 깊은 해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다음 해인 1978년은 벼 도열병이 전국적으로 발생하여 수확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기념자축 1년 만에 그랬으니 더 참담했지요. 그런데 도열병이 발병하기 전 아직 모종도 덜 마쳤을 3월경에 제 박사논문이 벼의 도열병 변이에 관한 연구라서인지 ‘일본식물방역잡지’기자가 찾아와서는 1977년 한국이 통일벼보급으로 식량자급을 달성하고 다수확품종으로서는 세계적으로 대단한 성과를 냈는데 언제 통일벼에 도열병이 발생할지 예측을 해달라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올해가 위험하다고 했더니 그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거였습니다. 승낙을 하고나서 생각해 보니 국내사정을 일본잡지에 발표하는 것이 께름칙해서 일본 도열병 전문가인 ‘야마다 마사오’와 공동명의로 글을 실었습니다. 당시 통일벼는 1972년 시범보급을 하기 시작하여 1973년부터는 전국적으로 보급하여 해마다 그 수확량이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보통 품종의 경우에는 도열병균에 대한 ‘고도저항성(처음 도입종의 병에 대한 저항력이 기존의 종보다 큰 것)’이 2~3년이면 위력을 다하고 도열병변이균에 의해서 병변이 발생하는데 통일벼의 경우는 1976년에야 전북진안에서 동일계품종인 “통일찰”과 “유신”에서 목도열병이 발생되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발생되지 않았고 1977년에는 진안뿐만 아니라, 함평에서 ‘통일찰’은 물론 ‘유신벼’, 노풍벼‘ 등에서 입도열병이 발생했으나 이 해에도 운 좋게도 가을 날씨가 너무 좋아 또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식량자급의 대업적을 달성한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열병 전문가인 나로서는 날씨만 나쁘면 대량으로 발생할거라 예측을 했던 거죠. 그래서 1978년이 위험하다고 글을 기고했는데 그 해 가을 도열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난리가 난거죠. 그런데 제가 이런 내용의 글을 썼다는 걸 알고는 박사학위도 안 마쳤는데 당장 귀국하라고 종용하는 겁니다. 다행히 여러 분의 도움으로 약간 시일이 연기가 되어 박사학위논문은 제출하고 그 이듬 해 1월 귀국을 하자마자 ’청와대‘ 경제수석실의 호출을 받고는 잔뜩 긴장을 하고 가니 아니나 다를까 왜 진작 알았으면서도 미리 우리나라에 알리지 않고 일본잡지에 기고를 하였는가며 추궁을 하였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기지를 발휘하여 벼 도열병의 성질과 변이현상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을 하고는 일반적으로 외국벼의 유전인자를 도입하여 육종한 고도저항성품종들의 경우 2~3년이면 이병화현상으로 도열병에 걸려 큰 피해를 입는 것이 통례인데 통일벼는 5년이나 견디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우수품종개발에 대해서 칭찬을 해야 할 일이며 벼의 고도정항성 품종의 이병화현상은 이미 그에 관한 전문가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일이며 이에 관한 주의를 한국에서 매 회의 때마다 거론하였다라고 했더니 오히려 나중에는 이런 연구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물어보아서 격리온실과 여러 실험기자재와 연구인원의 확충을 얘기했어요. 그대로 당장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청와대를 들어갈 때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칭찬을 받고나니 마음이 날아갈 듯 기뻤죠. 돌아온 뒤 진흥청장님의 칭찬은 물론이고 그 후의 순탄한 승진 등은 그 때 일의 영향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고, 한편은 너무 기분이 좋은 기억입니다.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일은?
학부 1학년 당시 농생물, 농화학, 농가정학과 세 학과의 합반 강의가 있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교실에만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았던지 세 반 모두 강의를 거부하고 수원 인근의 용주사, 융건릉 등으로 소풍을 갔다 왔습니다. 덕분에 세 반 전체가 농대에 길이 남을 단체정학처분을 받았지요. 그래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군요. 그리고 2학년이 되던 1960년 4월 20일, 당시 우리 집이 학교 인근이고 내 생일날이기도 해서 친구들 몇 명이랑 아침 생일 밥을 같이 먹고 있는데 4.19보다 하루 늦은 우리 농대생의 데모대행렬이 교문입구에서 수원역전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 길로 우리는 대문을 박차고 나가 논을 가로질러 데모대 행렬에 합류를 하곤 수원역으로, 남문으로 냅다 한 바퀴 시위를 하였습니다. 마침 학생 과장이셨던 이승환선생님이 수원경찰서장이랑 막역한 관계여서 오히려 경찰이 학생들을 호위하다시피 하여 모두가 다행히 무사히 시위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농진청 퇴직자모임인 ‘농진회’의 회장을 맡아서 퇴직자들의 화합에 일조를 하고 있고 제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간간히 골프모임에도 나가고 있습니다. 건강의 최고의 조건은 다정한 벗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사소한 일에 화내지 않으며 오라고 부르면 즐겁게 모임에 나가고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맛있는 음식도 사면서 즐겁게 지내려고 합니다.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제가 집에서는 좀 무뚝뚝합니다. 거기에다 아들만 둘입니다. 다들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도록 아내가 반듯하게 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현업에 있을 때에는 일에만 매여 있다 보니 아이들 교육과 집안일은 모두 아내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찍 어머님께서 돌아가셔서 아내는 시집오는 그 날부터 홀시아버지를 모셔야 했습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버님은 어머님과 함께 사신 날보다 며느리와 산 날이 훨씬 많으셨습니다. 자상하지도 못한 남편과 온통 남자들만 득실대는 집안을 평안하게 잘 맡아 살림을 해온 아내에게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한 번쯤은 딸처럼 엄마에게 잔정을 표현해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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