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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 그리고 상록의 아들 | 흐린 기억 속에 늘 푸른 너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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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8-29 16:10 조회1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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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기억 속에 늘 푸른 너를 부른다.
 
 
‘늘푸른 상록, 83동기여 영원하라’
이규철(농기계83)
 
1983년 1월인지 2월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진눈깨비로 진창이 되어 버린 서울대학교 대운동장을 걸어가던 기억. 요즘은 ARS나 인터넷으로 합격발표를 집에서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그때는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러 학교를 가야만 했던 것 같다. ‘640XX’ 아직도 기억나는 수험번호. 난 왜 이 쓸데없는 걸 아직도 기억하는지. 하얀 백지에 손으로 썼을 것 같은 합격자 명단에 쓰여 있던 저 수험번호. 그로부터 지금껏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서울대 농대 ‘83학번’, 그때는 농과대학이었으니.
80년대의 대학 캠퍼스에는 졸업정원제라는 기이한 제도 때문에 상당히 많은 대학생들이 북적대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그 졸정제의 혜택(?)으로 지금은 입학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그 당시에 우주왕복선, 워크맨 그리고 퍼스널 컴퓨터 등을 신기해했던 나는 막연히 공대를 가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학력고사를 망쳐버렸던 상황에서 그나마 농대에서 선택할만한 전공이 농공학과였고 다행히 합격통지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어영부영 관악캠퍼스에서 신입생 1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니 진입생 신분으로 수원 상록캠퍼스로 주둔지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주지가 안양이었기 때문에 관악이나 수원이나 통학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농공학과는 2학년 진급하면서 전공을 기계와 토목으로 나누었는데, 토목전공에 있었던 고등학교 2년 선배의 카이스트 입학시험 족보를 흔들던 그 꼬임에도 흔들리지 않고 농기계 전공을 선택했다. 그 당시 전통이었던 진입생 환영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수원 남문 근처 식당에서 농대 정문까지의 장거리 마라톤도 무사히 넘기고 본격적인 상록캠퍼스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5공화국 시절이었던 그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낭만적인 대학 캠퍼스 생활을 즐기지는 못했지만, 없는 시간 쪼개서 수원 남문, 서울 종로, 신촌 등지로 미팅도 참 많이 다니곤 했었다. 딸기, 포도철이면 학교 후문 포도밭이 있는 식당에서 막걸리 그리고 소주와 써니텐 각 한 병씩 주전자에 섞어서 마시던 소텐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수원역까지 구보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당시 젊으셨던 농기계과 교수님들은 강의시간에 쪽지 시험, 과목에 따라서는 일주일에 한번 또는 한달에 한 번씩 시험을 쳤기 때문에 졸업정원제로 뽑았던 잉여 인원 30%는 학사경고와 경고 누적으로 인한 제적을 피하기 위하여 군입대 또는 재수 준비로 자연스럽게 학교를 떠나면서 그렇게 정리되었다. 농대에 있던 샌드페블즈에 입단하여 중고딩 시절에 꿈꿔왔던 대학가요제에 입상하겠다던 꿈은 그 당시에 단원으로 있었던 고딩 선배의 “샌페 입단과 동시에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는 엄포(?)에 눌려 자연스럽게 접게 되었고, 대학 학창시절의 동아리 활동은 3학년 때부터 시작한 학군단 생활로 마무리되었다. 난 그렇게 ROTC를 동아리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마무리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군대의 의무복무를 위하여 임관고시라는 산을 넘어야 했다. 2년 4개월의 짧지 않은 군복무 이후에 뭘 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차에 학창시절에 미처 하지 못했던 공부라는 것을 좀 더 해보기 위하여 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러야했고, 육군 중위로 전역하여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 이후에 농촌진흥청을 잠깐 다니다 선배의 권유로 대한민국의 이름없는 조그만 중소기업을 대기업만큼 크게 키워보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대학원 박사과정도 진학하게 되었고, 사회생활과 병행하는 박사과정에 필연적인 휴학과 재등록, 논문제출 자격시험, 논문 주제 선정 과정 등을 거치다 수료 이후 논문제출 기간을 맞추지 못하였다. 이후 구제 과정 등을 거쳐 입학 이후 대략 16년 만에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에 농과대학은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수원 상록캠퍼스는 관악으로 이전하였고, 농학 학위는 공학 학위로, 과명도 바이오 시스템 엔지니어링으로 변경되었다.
짧지 않은 단과대학과 대학원 시절동안 변함없이 후학 지도에 물심양면으로 힘써 주시던 분이 현재 농생대 동창회장이신 류관희 교수님이시다. 그간의 스승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방법이라 생각하여 올해 졸업 30주년 상록의 날에 ‘83학번 학외대표를 맡아 나름 성실히 준비하고 5월 13일 토요일에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마음 한구석의 짐을 그나마 덜은 것 같아 다행스럽다. 2월24일 상록의 날 행사 준비 1차 모임부터 참여하여 사상 최대의 동창회 기금을 ‘83학번 이름으로 기부할 수 있게 성심성의껏 참여해준 각 과의 대표들은 영원토록 잊지 않고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동기들이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에도 십시일반 도움을 준 ’83동기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늘 푸른 상록, ’83동기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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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다시 그려보는 서둔벌 이야기
김찬중(농교육83)
 
-마깨비(관악기숙사 마동의 별칭)의 일년-
많은 사람들이 소원하는 대학을 선택한 것은 도대체 그 곳에 가면 무엇이 있기에 그리들 가려고 하는 지를 풀어보고자 하는데 있었으며 그 답은 나름 인적네트워크 등으로 현직을 수행하는데 도움을 받고 있다고 평가한다. 운 좋게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고 덕분에 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었으며 학교를 나다니는데도 편리했었다. 라운지를 개조하여 방으로 활용되는 103호에서 체육교육과 3년 선배와 농화학과 동기생 그리고 내가 같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선배가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기에 편리한 점은 한 가지 분명했다. 그 것은 밤에 낙성대에 내려가 야식을 조달해 오는 기동성을 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운전에 자신이 없고 두려웠던 나는 경사지인 그 길을 오르내릴 때 늘 긴장했었고 두 다리가 후들거려 아찔했었다.
 
관악캠퍼스는 외곽도로가 4km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촌에서 나고 자라서 아침잠이 적었던 나로서는 틈나는 대로 담박질을 했으며 대학의 4.19기념마라톤대회에 참여하여 앞사람을 한명 한명씩 뒤로 재끼면서 약 12km정도의 정해진 코스를 골인하면서 받은 순위는 17번 째였다. 당시 제 17회 대회였는데 행운의 부상이 있을 것을 기대하였으나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또한 과체육대회가 서둔캠퍼스에서 열렸는데 당시 마지막 종목이 마라톤이었다. 서둔동 캠퍼스 울타리 밖으로 한 바퀴 도는 것인데 약 4km 정도로 기억한다. 선두그룹을 유지하면서 마지막 골인지점을 들어오는데 계승학 선배님이 양보하시어 내가 염치없는 일등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선배님들의 후배에 대한 깊은 배려와 사랑을 잊을 수 없다.(승학이 형님 고마워요! 일등 시켜주셔서...)
관악 생활에서 한 가지 기술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는 부산식당이다. 그 곳에서 고종현, 백운기, 윤병찬 등 선배님들이 멀리 수원에서 올라와 선배라고 음식과 술을 사주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내용은 지금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들려주고 챙겨주신 것은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이다.
 
-서둔벌 시계 줄 절반은 연묵회 서실에서-
관악의 일 년을 마치고 서둔동 캠퍼스의 생활은 평소 글씨를 못쓰는 것을 개선해 보고자 ‘緣墨會’와 인연을 맺고 먹을 가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작품전을 위하여 몇 날을 지새우고 방학 때면 집중하여 연습한답시고 써클 룸을 지키곤 하였다. 당시 박상철 선배(81학번)의 작품은 내 눈엔 참으로 예술이었다. 언제 저렇게 멋진 글씨를 써보나 하였는데 결국 처다만 보고 끝난 것 같다. 졸업 후 전남 보성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보성향교에서 지역민들과 밤에 붓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나, 지금도 음식점이나 건물 내에서 마주치는 붓글씨 작품에 잠시나마 눈이 멈추는 것은 묵향 그윽했던 연묵회 서실에서 졸업 때까지 붓과 가까이 한 결과가 분명할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당시의 먹을 다시 갈아보고 싶은 충동은 여전하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이는 당시 아름다운 분들과 생활한 시간이 먹향을 잊지 못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밤중에 산중에서 큰일 보는데 뱀이 나타나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로 다섯 남매를 거두셔야 했기에 장남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한 끝에 장학금 혜택도 있고 장교로 군 생활도 할 수 있다기에 ROTC를 입단하여 여름방학이면 한 달 정도 입영하여 훈련을 받았었다. 훈련과정에서 동기가 포복을 하다가 뱀에 물려 후송을 간 그날 밤에 ‘A형’ 텐트에서 야영을 하는데 뱀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뱀이다”라고 큰소리로 외쳤고 옆에서 같이 누워 자던 고영주도 놀래 소스라쳤으며 주변의 텐트 속 동료들이 모두 놀래 잠에서 깬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간에 풀밭에서 엉덩이를 까고 조용히 큰일을 보던 동기생은 볼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뱀을 본 나는 어떠했을까. 아무 이상 없었고 단지 꿈을 꾸었던 것이다. 낮에 동료가 뱀에 물린 것이 꿈속에 나타난 것이다. 지금도 당시의 동기들을 만나면 ‘뱀이다!’로 배꼽을 잡는다.
 
-농대 졸업 30주년을 보내며-
대학 졸업 30주년 기념을 겸하여 실시하는 상록의 날 행사를 준비하며 동기들과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을 깊게 하였다. 물론 정해진 시간은 아니지만 번개팅 비슷하게 만났던 추억도 있지만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계획적인 모임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내지 못한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계기였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지방과 중앙의 곳곳에서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느라 서로를 챙기지 못하다 보니 이제는 길에서 마주쳐도 못 알아보는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된다. 조금 여유를 갖고서 교행을 하였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 만큼 앞으로는 그런 서운함을 적게 만드는 우리가 되었으면 싶다. 다행이도 나의 경우 동기와 선후배 10여명이서 ‘사일회’라는 이름으로 매년 두 차례씩 밤을 새며 회포를 푸는 기회를 갖고 있다. 이제 83동기를 먼저 챙기는 노력을 해야겠고 그 폭을 넓혀 연묵회 식구들도 묵향 속에서 지난날의 모습을 다시 찾는 기회를 갖고 싶다. 또한 은사님들도 기회 될 때마다 뵙는 부지런함을 갖겠다.
농대 동문들이 정계와 학계 그리고 업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오늘 미약하나마 지금의 자리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일굴 것을 다짐해본다.
-전남 나주 금천면 원곡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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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의 날 행사를 준비하며
하영주(농화학83)
 
2017년이 우리가 졸업한 지 30주년이 된다는 사실은 상록의 날 준비를 하기 전까지는 사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2013년에 학과 동문회에서 입학 30주년 행사를 준비할 때는 83학번 모두가 같은 입장이었다. 입학은 모두 1983년에 했으니까. 그런데 같은 83학번이라도 군대를 가지 않은 남학생과 여학생은 대부분 1987년 2월에 졸업했지만 군대를 갔다 와서 졸업을 하거나 당시 여러 이유로 제때 졸업하지 못한 동기들은 1987년 이후 졸업을 했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2017년 올해가 83학번 모두에게 졸업 30주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해는 모두에게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지겨운 교복과 시험으로부터 해방되어 대학생활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과 희망을 품고 교문을 들어섰을 테니까. 고등학교 졸업 30주년 또는 대학입학 30주년인 해는 무언가 큰 변화가 있었던 해를 기념하는 그래서 고등학교 동문회나 대학 동문회에서 대부분 기념모임을 하는 그런 해인 것 같다. 하지만 대학졸업 30주년이 되는 해는 각 자에게 다른 해로 기억되는데다가 그 시절 대학생활이라는 것이 그다지 즐거웠을 리 만무한 우리에게는 1987년 2월 졸업식장의 혼란스러움 – 우리는 당시 총장의 졸업축사 시작과 함께 일제히 뒤돌아서서 나와 버렸다. - 과 함께 각자의 진로에 따라 흩어졌다는 표현이 맞는 그런 해인 것 같다. 그러니 졸업 30주년은 83학번이 농대를 다니던 세월이 이제 30년이 흘러갔다는 세월의 무상함만 남아 있는 그런 의미로 처음 다가왔다. 하지만 상록의 날 준비 첫 모임에서 다른 과 83학번 동기들을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순간 반가움과 함께 수원캠퍼스에서의 학부 3년이 아련한 추억으로 되살아났다. 농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수원캠퍼스는 지금 농생대 학생들에게는 그저 지나간 역사로만 기억되겠지만 관악에서 교양학부 1년을 마치고 수원캠퍼스에서 3년을 보낸 우리에게는 뭐랄까 서울대 속의 또 다른 서울대, 서울농대만의 – 또는 수원농대, 역전농대로 불리는 - 고집스럽고, 촌스럽고, 고향 같은 추억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몇 해 전 우연이 수원캠퍼스를 둘러보게 되었다. 그 때 놀라움이란!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은 수원캠퍼스는 대운동장에 세워진 학교를 제외하면 모든 건물이 졸업한 1987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건물 안에 책상과 실험기구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은, 잡초와 색 바란 건물 칠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그 시절 내 자신이 바로 튀어 나올 것도 같은 그런 모습으로 예전 수목원에 있었던 기숙사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틀림없이 대강당의 거대한 소변기도 아직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날 내가 본 수원캠퍼스는 떠나버린 농대가 –농생대가 아니다 -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실연당한 농대생 같았다.
여하튼 상록의 날 준비 모임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들 – 축산과 대표 염동민은 회사 임원답게 몸은 불었지만 입담은 여전하고, 임학과 대표 학생회장 박현은 아직도 미남이고, 이제는 졸업앨범을 보고 얼굴을 떠올려야 할 만큼 나이 들어 버린 각과 대표 얼굴들이 반갑고 즐거웠다. 준비 모임에서 각 학과 대표에게 맡겨진 중요한 임무는 상록의 날 기금 모금과 동기 주소록 작성이었다. 주소록 작성을 위해 동창회에서 전해준 입학동기 명단은 졸업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어 정리하고 보니 농화학과 83학번은 졸업인원이 42명 이었고 현재 연락되는 인원은 25명 정도였다. 다행히 상록의 날 취지를 이해한 동기들이 적극적으로 기금모금에 참여해 주었다. 행사당일에는 류순호 교수님과 공식인증사진을 함께 찍은 멀리 전남 여천에서 참석해준 이승필 관장과 홍인석, 강대욱 교수가 있었고, 예식장 피로연도 아닌데 식당에 먼저 가서 비공식 인증사진을 찍은 최병갑 그룹장, 김문찬 전무, 정호선 팀장, 김용상 수석이 참석해 주어 고마웠다.
이번 상록의 날 행사에서 정철영 학장님이 농생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후 이룩한 성과를 설명하고 제2의 도약을 위한 농업생명과학교육 연구센터 건립계획을 발표했다. 동문들의 많은 관심과 도움도 부탁했다. 이제 관악에서 농생대의 시대가 활짝 열리는가 보다. 기쁘면서도 한편 버려진 수원캠퍼스가 생각났다. 다행이 이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지난해에 수원캠퍼스가 경기상상캠퍼스로 새 단장 되었다고 한다. 농화학관을 비롯한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문화예술공간으로 거듭났다니 실연의 아픔(?)을 딛고 수원캠퍼스가 새로운 기억의 공간으로 거듭나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았으면 한다. 이번 휴가에는 아이와 함께 새 단장된 수원캠퍼스를 찾아 30년 전 기억을 추억해봐야겠다.
참, 이번 상록의 날 행사에서는 결혼이 늦어 이제 야 초등학교 6학년과 1학년인 내 아이들이 동문 선후배들이 귀엽게 봐 주어서 그린벨 우승자로 만들어 주었다. 류관희 동창회장님이 아이들에게 해 주신 덕담이 오래도록 아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아직 아이들은 상품으로 받은 노트북패드의 사용권에만 관심을 두고 다투고 있지만 철이 들면 그 때의 기억이 성취의 동기가 될 것이다. 내 선친은 농화학과 55학번이신데 살아계셨을 때 동문회에 참석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아셨다. 이번 상록의 날 행사를 보셨다면 손자들의 모습을 흐뭇해하시며 동문여러분께 큰 감사를 드렸을 것 같다.
 
졸업후 30년 만에 처음만나 행사를 함께 준비한 이규철 동기를 비롯한 각 학과 대표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동문회와 농생대 발전을 위해 항상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류관희 동창회장님과 정철영 학장님께도 항상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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