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학인의 상식, 조선시대의 농서(農書) > 주요소식

본문 바로가기

Since 1948, www.snuagria.or.kr 페이스북아이콘트위터아이콘

주요소식

동창회보주요소식

동창회보

주요소식

식량과농업 | 농학인의 상식, 조선시대의 농서(農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4-20 10:22 조회511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농학인의 상식, 조선시대의 농서(農書)
김영진(농학53)
 
농업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며 역사감각은 지성인의 필수적 자질이다. 따라서 농학인들이 농업사를 이해하는 것은 국민이 국사를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우선된 중요과제다. 농업사 이해의 기초는 생산기술의 발전상을 시계열적으로 파악하는데 있다. 그 생산기술을 기록한 것이 농업교재인 농서(農書)다. 농서란 의술에 관한 저술을 의서(醫書)라 하고 군사에 관한 저술을 병서(兵書)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이 농업에 관한 책을 통틀어 농서라 이름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농서가 편찬되었을까? 고려시대에는 농서편찬은 없었어도 농업기술개선을 위해 중국농서를 구입하여 농업교재로 활용하였다. 고려 선종(宣宗 1084-1094)때 한(漢)대에 편찬된 중국농서 범승지서(氾勝之書)를 고려에서 인쇄하여 백부를 중국에 공물(貢物)의 한가지로 송(宋)나라에 보낸 사실이 있다. 고려에서 중국농서를 인쇄하였다는 것은 고려에서 그 농서를 활용한 증거라 믿어진다. 그 후 12세기 초인 고려 인종(仁宗) 15년(1127)에는 송(宋)나라에서 편찬된 잠경(蠶經)을 가져다 이두로 번역하여 양잠교재로 활용한 사실이 있고 공민왕 21년(1372)에는 원(元)나라에서 편찬된 농상집요(農桑輯要) 한질을 가져와 우리나라에서 원형그대로 재판하여 영농교재로 널리 활용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중국농서의 활용은 차츰 불편한 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중국농서는 중국의 기후풍토를 기반으로 엮어진 농서라 중국과 환경이 다른 우리의 농업현실에 잘 맞을 수가 없었다. 이에 조선조정은 우리풍토에 맞는 우리농서를 꾸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겐 농서를 편찬할만한 농업지식의 축적이 없었다. 이때 차선책으로 고안된 것이 중국농서에서 우리 실정에 맞는 부분만을 초록하여 농업교재로 쓰자는 안이었다. 이 첫 번째 초록본 농서가 태조의 명으로 1399년에 편찬된 신편집성마의방(新編集成馬醫方)이다. 평생 군인으로 살다 왕이 된 이태조는 전투용 말의 의술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이 책의 4분의 1은 소에 관한 수의서가 부록으로 풀이되어 있는데 초록원본은 중국 백락(伯樂)의 수의서로 믿어진다. 그 후 태종은 대제학 이행(李行)에게 중국의 농상집요(農桑輯要)에서 작물부분을 초록토록 하여 1415년 농서집요(農書輯要)를 편찬하였고 같은 해 우승지 한상덕(韓尙德)에게 명하여 농상집요의 양잠부분을 초록하여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를 편찬하였다. 이와 같은 중국농서의 초록본 농서들은 우리의 실정에 맞는 부분만을 초록한 것이라 농서로 활용하기에 부족한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이에 세종은 우리 풍토중심의 우리농서를 편찬코자 농업기술이 보다 선진된 충청, 경상,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각 고을의 경험 많은 선진농가를 찾아가 그들의 농법을 기록하여 중앙에 진달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달된 기록들을 환경지식이 많은 공조판서 정초(鄭招)와 문장에 뛰어난 변효문(卞孝文)에게 지시하여 작물별로 체계화하라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처 완성된 농서가 1429년에 완성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다. 그러니까 중국농서를 교재로 쓰다가 중국농의 초록본을 쓰다가 마침내 우리풍토에 맞는 우리농서를 편찬한 것이다.
 
이어서 1450년경에는 어의로 있던 전순의(全循義)가 산가요록(山家要錄)을 편찬하였는데 특기할 것은 이 책에 겨울철에도 채소나 꽃을 기를 수 있는 온실설계와 그 이용법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또 1460년경에는 강희안(姜希顏)이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저술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개화시기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기법과 15세기의 접목기술이 기록된 것이다. 강희안의 아우 강희맹(姜希孟)은 1472년 금양잡록(衿陽雜錄)이라는 농서를 편찬하였는데 곡숙류(穀菽類)80품종에 대한 품종해설과 바람의 피해를 풀이하다 ‘풴(fohn)’현상을 밝힌 것이다. 그는 또 당나라 한악(韓鄂)이 편찬한 사시찬요(四時纂要)를 본 따 사시 24절후별로 농가가 할 일을 풀이한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를 저술하였는데 곡류와 더불어 다양한 과수와 채소재배법을 풀이하고 있다.
 
16세기에 편찬된 농서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농서는 1540년에 김수(金綏)가 편찬한 수운잡방(需雲雜方)이 있다. 그 내용은 각종 식품의 조리법들이다. 1541년에는 가축의 전염병치료법에 관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이 편찬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한문으로 풀이한 것을 이두로 다시 풀이하고 이것을 또 다시 한글로 풀이한 것이다. 동일언어를 쓰는 나라의 교재가 세 가지 문체로 쓰인 것은 세계적으로도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17세기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피폐된 농촌의 경제재건을 위해서인지 여러 가지 농서가 편찬되었다. 류성룡의 아들 류진(柳袗)은 1618년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를 저술하였는데 갈대밭을 논으로 개답하는 요령이 특이하고 같은 해 홍길동전으로 더욱 유명한 허균(許筠)은 한정록(閑情錄)이라는 농서를 편찬하였다. 여기에는 비로소 줄모심기가 풀이되고 논 이모작으로 논보리재배법이 처음으로 풀이되고 있다. 허균은 1611년 귀양살이하면서 먹고 싶은 게 많았던지 지난날 화려한 시절에 먹어본 팔도명식품을 풀이한 도문대작(屠門大爵)이라는 식품서도 저술한 바 있다.
 
1619년에는 문경에 살던 고상안(高尙顏)이 농가월령(農家月令)이라는 농서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에 맥류의 춘화처리(春花處理)법이 풀이되어있다. 춘화처리는 1928년 소련의 Lysenko가 개발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으면서 농학의 한 이론으로 자리잡은 것인데 고상안은 그보다 3백년 앞서 춘화처리를 개발하였다.
 
1655년에는 공주목사 신속(申洬)이 당시 개발된 농업기술을 망라하여 농가집성(農家集成)이라는 농서를 편찬하였는데 특기할 것은 벼 모내기 때 소주밀식(小株密植)과 얕게 심어 유효분열을 증대시키는 방법과 목화의 순치기요령 등이 풀이 된 것이다. 신속은 이 책을 편찬한 공로로 효종(孝宗)으로부터 호피(虎皮) 두 장을 상품으로 하사받았다. 박세당(朴世堂)은 1676년 색경(穡經)이라는 농서를 편찬하였는데 특기할 것은 벼농사에 처음으로 덧거름, 알거름의 사용법을 밝히고 만상의 변화를 보아 농업기상을 단기 예측하는 방법을 농서에 반영하였다. 예컨대 햇무리가 지면 비가 내린다는 것 등이다.
 
18세기에는 벼 모내기 재배의 보편화와 채소의 집약재배 등 우리 농업기술개선의 약진기였다. 이시기의 대표적 농서가 1700년경에 편찬된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다. 농업의 온갖 분야가 망라된 4책의 종합농서다. 그 특징은 그때까지 편찬된 우리의 풍토농서 중 가장 체계적이며 세세한 서술마다 반드시 인용문헌을 밝히고 있다. 또 당시에 개선된 신기술은 속방(俗方) 또는 최근 새로 개발된 기술이란 뜻으로 근법(近法)이라 밝히고 있다. 이어서 1771년에는 서명응(徐命膺)이 관리들의 권농지침서로 고사신서(攷事新書)를 편찬하였고 1776년에는 유중림(柳重臨)이 산림경제의 내용을 증보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를 편찬하였다.
 
정조(正祖)는 정조22년(1898) 당시까지 개발된 최신의 농업기술을 망라한 농서, 농가지대전(農家之大典)을 편찬할 목적으로 전국의 실학자들에게 각자가 알고 있는 최신농법을 글로 써 올리라는 구농서윤음(求農書綸音)을 발표하였다. 윤음이란 왕의 말씀을 존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이 왕의 요청에 따라 진달한 농서를 응지농서(應旨農書)라 하는데 응지한 70여종의 농서 중 두드러진 농서는 1799년에 서호수(徐好修)가 편찬한 해동농서(海東農書)와 박제가(朴齊家)가 편찬한 진북학의(進北學議), 이대규(李大圭)의 농포문답(農圃問答), 박지원(朴趾源)의 과농소초(課農小抄)등인데 박지원은 그 내용이 훌륭하여 면천군수에서 양양부사로 특진하였다. 불행하게도 정조가 1800년 갑자기 승하하여 그가 계획했던 「농가지대전」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의 윤음이 동기가 되어 18세기말은 농서편찬의 황금기가 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1804년에 편찬된 수원유생 우하영(禹夏永)의 천일록(千一錄)은 자기 영농경험을 바탕으로 엮은 훌륭한 농서다. 그 내용 중 대소변의 비료성분을 보존하는 방법이 주목된다. 그 밖에 여러 농서가 편찬되었지만 가장 훌륭한 농서 하나를 든다면 서유구(徐有榘)가 1840년경에 완성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다. 당시까지 개발된 농업기술을 총망라한 결산서이기 때문이다. 1881년에는 일본시찰단의 한사람으로 일본에 갔던 안종수(安宗洙)가 일본에서 얻은 서양 농학서를 바탕으로 최초의 서양농학을 풀이한 농정신편(農政新編)을 편찬하였다. 식물도 숨을 쉬고 작물도 암수가 만나야 열매를 맺는다는 서양의 실험농학을 최초로 밝힌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백여 종 넘는 농서가 편찬되었다. 그 중 여기서 열거한 중요농서는 대부분 지난 16년간 농촌진흥청에서 국역하였음을 첩언한다.
 
 
♣우리 농서 찾아보기
농촌진흥청홈페이지->농업과학도서관->기타발간도서->농업고서(우리말번역본)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