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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뵙고싶었습니다 | 농공학의 산 증인 이기춘(농공 46)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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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5-12 12:44 조회2,0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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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공학의 산 증인 이기춘(농공 46) 교수
 
 
류관희, 이중용 후배와 함께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요즘 외부활동 없이 집에서만 지내고 있었는데 이렇 게 동창회에서 찾아와 주어 고마워요. 특히 내가 좋아하 는 교수님들이 찾아와 주어 반갑군요. 요즘은 글씨 쓰는 것도 힘이 들고 산책도 힘이 드네요. 젊을 때는 걷고 뛰는 데는 자신이 있었는데. 농대 학생 시절엔 대표로 마라톤 을 곧잘 했었지요, 1.4후퇴 당시에는  수원에서 대구까지 걸어갔던 기억도 납니다. 그랬는데 2014년에 대상포진 앓고 나서 다리에 힘이 빠지고 바깥 외출을 잘 하 지 못해서인지 낮에는 자주 졸아요. 하지만 나이를 생각 하면 건강하다고 생각해요.
아내는 아다시피 병석에서 오랜 기간 고생하고 있지만 자녀은 모두 건강하게 일하니 행복하지요. 장남은 개인 건설회사 부사장(토지공사 퇴직, 기술사), 차남(기술사)은 농촌공사 퇴직 후 개인 건설회사 전무로 일하고 있고, 3 남은 환경부국장(기술사), 4남 자영업, 장녀는 이학박사로 남편의 사업을 돕고 있어요. 손자는 4명, 손녀는 2명이 있 습니다.
 
어떻게 농대에 입학하게 되었나요?
부모님은 내가 사범학교로 진학하기를 원했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해서 시골 학생이었던 나는 사범학교 시험에 서 떨어졌지요. 시험준비를 겸하여 중동학교를 수학했으 나 학력 인정을 받지 못하는 곳이어서 다시 경성농업학교 시험을 봤어요. 당시엔 합격자를 신문에 발표했는데 내 이름이 조선일보 합격자 명단에 들어 있었어요.
부친께서 는 측량기사를 하고 계셨는데 그 영향으로 농업토목분야 에 입문한 셈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 학교는 나름 인정받는 곳이었어요. 타 학교 출신들의 월급이 20원 일 때 경성공립농업학교 졸업생은 28원을 받았으니까요.
그렇게 서울시립대 전신인 경성공립농업학교 농업토목과를 졸업하고 194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문부 농공 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죠. 마침 국립서울대학교가 출범 하면서 입학 당시 학제로 졸업할 것인지 4년제로 졸업할 것인지 정해야 했는데 나는 빨리 졸업하기 위해 구제도로 졸업했고 오산중학교(경기도)에 교편을 잡았지요.
그런데 학과 교수님들이 계속 대학을 졸업할 것을 권유하셔서 다시 대학에 돌아와 동기들보다 졸업이 1년 늦어졌습니다. 대학 시절에 나는 이미 경성농업학교에서 중요 과목을 배 웠기 때문에 측량실습의 경우에는 조교 역할을 했어요.

졸업 후 어떤 일을 하셨나요?
졸업하고 다시 오산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29세 에 교감으로 진급해서 3년간 근무했어요. 그 나이에 교감 이란 직책이 어울리지 않지만 그때는 그랬지요. 하지만 주변에서 전문지식을 살려야 한다는 권유로 시립농대 교수로 갔지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매우 바빴어요.
경성 농업시절에 제도학을 배운 덕으로 제도를 잘하니까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요청했지요. 그래서 고려대, 중앙대 강 사로 26년을 출강했어요.
내가 모교인 서울대에 출강하게 된 것은  제도학 강의 거부 사태가 발생하여 이창구 교수가 강의를 요청한 것 이 계기가 되었지요. 그때부터 10년간 서울대에서 강의했지요.
한편으로는 농림부 정책자문위원, 건설부 자문위원, 상공부 KS 마크 심사위원, 농촌진흥공사 표준국 등에서 활동하면서 농업진흥공사 기술직공무원 출제위원 등으로 바쁘게 다녔어요.
내가 수원에 강의하러 갈 때면 수업 끝나고 한잔 좋아 하는 변부엽 선생과 이창구 선생이랑 학교 앞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매운탕 끓여서 먹기도 했었는데 참으로 시간이 빠르군요. 그리고 민간 차원에서 한·일 간 농공학 기술교류를 했던 것은 우리나라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전북대로 옮기셔서 그곳에서 퇴임하셨지요?
내가 근무하던 시립대학에서 서울에 농대가 뭐 필요하 냐 하며 시립대의 농과대학을 없앴어요. 심종섭 총장님과 고재군 선생의 도움으로 전북대로 가게 되었는데, 심 총장 이 은인이시지요.
대학을 옮길 때에는 두려움도 있었지요. 그러나 전북대로 옮긴 뒤에 학과장을 맡았는데 학생들은 물론 젊은 교수들이 학과장실에 늘 찾아왔고 후학들이 잘 따라주어 인기가 높아서 기존 교수들이 부러워했지요.
가을체육대회 때면 해마다 분쟁이 발생했는데 체육과 교수들이 말리고 해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나를 보고 부 탁했어요. 그래서 늘 체육대회가 있으면 본부석에 앉았고, 분쟁에 대해 이치를 따져 학생들을 설득하면 대부분 수긍 을 했어요. 내게 남을 설득하는 능력이 있었나 봅니다.

교수 생활에서 아쉬운 점이 있을까요?
여기 두 분 류관희 교수와 이중용 교수님 계시지만 학생들 성적을 너무 박하게 줄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능력이 다 다른데 숫자로 잘라서 표현할 수 있을까. 대개 우수한 사람은 100에 가깝지만 대부분은 중간쯤 하는데 말이죠. 백문한 선생은 여행 가서 만나 밥숟가락 들면 농담으로 ‘대학 때 왜 저에게 D학점을 주셨어요?’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좋게 평가할 것을 그랬다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부채와 족자를 선물해주셨는데 서예를 언제부터 하셨어요?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 이야기입니다. 나의 작은 증조부는 명필로 유명하셨는데 어느 날 증조부가 족보에 작은 글씨를 쓰시는데 그 모습을 보고 제가 반해서 글 쓰 는 것을 흉내냈지요.
그걸 보시고 증조부께서 소질을 인 정하셔서 글씨 쓰기를 배웠어요. 그러다가 소학교에 입학 하여 열린 학예회에서 제가 天心無厚薄(천심무후박: 천심은 아무한테나 두껍거나 박하지 않다는 뜻으로 모두에게 공평하다 는 말)을 여러 어른들 앞에서 썼는데 마을 어른들이 칭찬 하시며 모두 신동이라 했어요.
시립농대 가자마자 글씨를 잘 쓴다고 소문이 나서 학장실에 감금당한 채 입학시험 문제지 등사하는 것을 시작 으로 합격자 발표에 쓰는 이름도 내가 다 썼는데 13년 정 도를 계속했어요.
또 모든 학생들의 졸업증서를 글자 하 나하나 10년간 썼지요. 그 당시 시립농대 졸업생은 모두 내가 쓴 졸업장을 받았어요.
졸업한 제자들 말로는 모두들 나의 흑판 글씨에 반했 다고 말합니다.
강의 시작하고 백묵을 들고 칠판 앞으로 가서 한시 한 수를 쓰지요.
‘松下問童子(송하문동자)하니 言師採藥去(언사채약거)라 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이나, 雲 深不知處(운심부지처)’. 제가 쓴 글씨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시립대학교 문패 와 농업토목학회지(1967년 이후 한글 표제) 글씨가 있지요.
시립대학교가 이전하면서 교문에 문패를 새로 하는데 서예에서 당대 내로라하는 분들 10여 명의 글씨를 받아 붙여 놓고 교수들의 투표를 받았는데 62명 중 28명이 내 글에 투표하여 내 글씨가 문패가 되었지요.
퇴임하고 나서 서예전에 출품하여 2번이나 특선을 했습니다. 글씨를 잘 쓴다고 8폭 병풍을 120개쯤, 6폭 병풍 을 아마 40개 정도 쓴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요즘 어깨가 아프답니다.

옛날을 되돌아보며 자랑을 하신다면?
제가 아직 농공학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농공학 분야에서 활동(종사)하고 있는 인사 중에 최고령(현 91세) 인 것이 자랑스럽지요. 가장 오랜 세월 동안 농공학 교수 로서 후진 양성에 종사한 사람은 이창구 선생과 나 둘뿐 입니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부터 농업토목교육을 받고 일 생동안 그 방면에 종사했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내 별명이 자명종이었을 정도로 강의는 물론 모든 일에 정확한 시간 을 지켰지요. 국민훈장으로 동백장 목련장, 석류장(박정희 대통령 생일 기념으로 시립농대 대표로 포상)을 수령한 것도 자랑스러워요.

후배들에게 말씀 부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통하여 사명감이 투철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언행이나 행동을 깊은 생각 없이 비판하거 나 흉보지 말 것이며, 또한 사람은 가정생활이나 사회생 활에 있어 유머가 있어야 해요.
그리고 자식들은 좀 심하 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엄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자식들에게는 좀 안됐다 할 정도로 심부름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경험을 얻어서 다음에 그 일에 부딪 쳤을 때 자신 있게 처리한다는 말이 있으니까요. [不經一 事 不長一智(불경일사 부장일지): 하나의 일을 경험 못하면 하나의 지혜도 얻지 못한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문부 졸업사진 (1949)
 
 
학력
1952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학부 농공학과 졸업(농학사)
1975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농학박사)
1982  일본 도쿄대학 농학부 농업공학과에서 연수
 
경력 및 사회활동
1957~1976   서울시립산업대학 교수(농공학과장 겸 도시공학과장)
1976~1992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농공학과장 겸 대학원 전공주 임교수)
1960~1969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강사
1961~1990  문교부 교육과정 심의위원
1962~1970  공업표준규격심의위원(상공부 표준국)
1963~1992  고려대학교 농과대학 강사
1973~1975  기술고등고시 시험위원
1974~1976  한국교육개발원 연구교수
1981~1989  농수산부 정책자문위원(농지수리분과 위원장)
1983~1985  한국농공학회 회장
1985~현재  한국농공학회 고문
1992  전북대학교 정년퇴임 명예교수
1962~1992  일본농업토목학회 정회원
1964~1992  일본농업기계학회 정회원
 
상훈
1968, 1970, 1977  한국농공학회 공로상
1972  교육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대통령)
1982  한국농공학회 학술상
1985  국민훈장 목련장(대통령)
1988  교육공로 표창장(문교부장관)
1992  국민훈장 동백장(대통령)

저서
1968  농업수리(문교부)
1969  농업용수개발 총람(농림부)
1970  조구(문교부)
1971  농업토목설계(문교부)
1972  신제 농업수리학(향문사)
1972  농업기계제도(문교부)
1973  농업토목설계편람(한국농공학회)
1973  최신 토질역학(수도문화사)
1973  표준 관개배수(삼경사)
1974  농업기계학(향문사)
1975  새마을기술편람(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1984  신고 농업수리학(향문사)
1979  관개배수(문교부)
1984  농업토목제도(문교부)
1968~1991   농지개량사업 계획설계 기준 시리즈(한국농공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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