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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그리고상록의아들 | 서둔야학 추억의 편린(片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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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5-11 17:54 조회2,1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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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둔야학 추억의 편린(片鱗)
                                                                                김영호(농생물 73) 모교교수

1973년 초, 대학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봄날로 기 억한다. 점심식사 후 식당 앞에서 어정거리고 있는데 동기인 최윤재가 아직 서클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함께 가자 고 해서 끌려가다시피 당시 서둔야학교 교장이었던 김기옥 형의 기숙사 방으로 찾아갔다.
근엄한 표정과 안경 너머의 매서운 눈초리로 왜 야학 에 들어오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하는 형 앞에서 처음엔 다소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그 분위기 때문에 나는 “상 록수에서의 야학정신” 운운(?)하면서 다소 환상적인 포부 (?)를 피력했다. 그 덕분인지 형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말 이 부드러워지는 듯했다.
나로서는 다소 어색한 자리였다. 그런데 무언가 모를 인간적이면서 친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다. 그날 이후 나는 형을 많이 따르게 되었고 함께 야학 활동을 하면서 학교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야학 동기 중 축산과 박중희는 만나자마자 죽마고우처 럼 친해졌다. 내성적인 성격인 나로서는 처음부터 신선한 충격이었다. 평소 네 발로 뛰는 연습을 많이 한 내가 투우 가 되고 투우사 역할로 짝이 되어 투우놀이를 한 적이 몇 번 있다, 어느 해 가을 녹원사 축제(갈잎제)에 우연히 같 이 초대되어 축제 마지막에 장기자랑 대회에서 투우놀이 로 생맥주 교환권으로 특상을 받은 기억이 있다.
  야학 동기 몇 명을 제외하면 나는 선배들과 더 많은 교 분이 있었고 친했다고 생각하는 선배는 모두 인간적인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람들뿐이다. 처음(1973년) 야학 교무 실에서 자주 만났던 분은 박의호 형으로 당시 2학년 국어 담당으로 기억하는데 교무주임을 맡고 있었고, 1974년에 는 교장을 하셨다. 1980년 말과 81년 초에 야학이 완전히 문을 닫기 전 함께 한 기억이 있는데 당시 교실에 전기가 끊겨 청계천이나 을지로에 등산용 가스등을 구입할 때 구 입비를 지원해주셨다. 미국에 유학 중일 때 의호 형으로 부터 받은 편지 말미에는 황토 자국이 찍혀 있었다. “고 국의 토양”이니 고향 집이 생각나면  꺼내보라고….
또한 김섭정 형의 “마이웨이” 등 팝송과 “그리운 금강 산” 등 가곡을 프로가수보다 더 잘 부르는 모습은 후문에 있는 사거리상회에서 “바다의 사나이”로 흥을 돋우는 것 이 전부였던 나에게는 문화적으로 큰 충격이었다. 또 한 번은 내 손금을 보자고 하더니, 요절할 상이라 한다. “미 인박명이요, 천재요절”이라고 생각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아마 그럴 것 같다고 했던가? 그런데 아직 살아 있 으니 얼짱도 천재도 아닌 모양이다.
노래라면 또 한 분 천선조 형이 생각난다. 형의 노래 솜 씨도 솜씨려니와 정말로 투명하고 청아한 정신이 감탄스 러웠다. 어느 날 학예회를 위해 야학 교실에서 연습을 하 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밤길에 나의 굵직한 베이스가 좋다 고 하여 잠시나마 좋은 환상에 잠기게 한 적이 있어 더욱 괜찮은 선배라 생각한다.
김석동 형의 부드러운 시선과 약간의 경상도 억양이 섞인 목소리도 좋았다. 조용하지만 강한 의지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실감한 것은 실로 오랜 후 형이 진흥청의 농 업과학원장을 할 때였다. 요즘도 만나면 “김생물” 하고 불러주니 그 당시 촌티가 넘쳐 야성적인(?) 내 모습이 어 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 그래도, 마음만은 비단 결”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 지 않았지만, 지금은 “동물”도 아닌 “생물”이라는 별명과 맞물려 이해가 되기도 한다. 지금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 았지만 함께 살아주는 아내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마디 하고 싶다. “그래도 마음만은 비단 결이라 하잖아요?!!!”
  한편 마음씨 좋은 시골 아저씨처럼 소탈한 성품을 가져 “나랄라” 별호를 가졌던 나병국 선배는 군복무 후에 야학을 다시 찾아왔는데, 나이 차이가 많음에도 허물없이 대해주어 많이 좋아했었다. 데모할 때 보여주었던 정부의 부당함에 대한 의분의 표시와 어느 외국 과학자 초빙 심 포지엄에서 보여준 해박한 학문적 지식을 접하게 되면서
소탈한 모습 뒤에 있는 열의와 예리한 지성의 면모를 보 게 되어 감탄한 적이 있다.
  야학을 시작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1학년 국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수업시간에 자주 교과서를 낭독하게 했 는데 학생들이 서로 먼저 읽으려고 “저요, 저요” 하고 손 을 들었다. 어려운 받침이 있는 낱말만 골라 받아쓰기도 시켜보았다.
시인 이은상 씨의 “겨레여 우리에겐 조국이 있다 …”의 운율을 따라 시를 지어보게 하니 곧잘 하는 것을 보고 아 이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다. 언젠가 소풍 때 박목월의 시 “윤사월”을 손오희가 외우는 것을 보고 놀랐 다는 표정으로 한 여선생님이 전해주는 말을 듣고 내가 잘 가르치고 있구나 하고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수업준비는 많이 부실했던 것 같다. 한 번은 교 무실에서 중간시험 문제를 초치기로 내고 있으니, 손명희 선생님이 “즉석에서 시험 문제를 내니 대단한 실력”이라 고 하는 칭찬(?)의 말을 듣고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내 심 부끄러웠다. 교육적인 면에서는 더욱 부족한 것이 많았다. 그때는 자신이 성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미숙한 것투성이다.
언젠가 휴일에 야학교를 가보니 교실에서 유 행가를 고성방가 중이다. 김형만과 남상구 둘이었다. “교 실은 신성한 장소”라는 단순한 생각에 화가 났었고, 근처 에 놓여 있는 큰 통나무로 아이들을 위협하며 나무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완전 폭력 교사였다. 그 후 남 상구가 결석을 자주 했고 얼마 후 다른 야학으로 옮겼다 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지울 수 없 는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이 가정적으로 어렵다는 사 실에 세세하게 마음을 쓰지 못한 것 같다. 나 자신도 가난 하게 자랐기 때문에 나에게 가난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 므로 노력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했었다.
수업이 있을 때나 수업을 마친 후에, 또 특별한 일이 없 어도 그냥 야학교 교무실에 나와서 남전(南田) 원중식 선 생님의 “소창다명(小窓多明)…”의 다소 신기한 글자체를 꽤 오랫동안 바라보며 감상하기도 했다. 교무실에 혼자 있을 때면 밖을 나와 들려오는 다른 교사들의 강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동기 이규석 의 대학 강의에서나 들을만한 역사 수업이었다. 수업이 다 끝나면 학생들을 고색이나 구운동에 있는  집까지 바래다주는 날이 많았다.
어느 해 야학 졸업식 후 밤이었던가. 눈이 많이 오고 난 후 날씨가 완전히 개어 밝 은 보름달이 떠 있는 목장 뒷길을 졸업생들과 노래를 부 르면서 걸어갔다. 참으로 다명(多明)한 밤이었다. 그 졸업 생 중 누군가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아직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야학교 행사 중에 임목육종연구소까지 경보대 회를 하다가 가정과 동기가 물에 빠진 일, 임목육종연구 소로 소풍 갔을 때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보통리 저수 지에서 가진 엠티, 홈커밍 데이에 황건식 선배님의 구수 하고 다소 느린 가곡을 들은 일 등, 그저 모여 즐거운 한 때를 보낸 것이 전부였는데 무엇 때문인지 그 모든 것이 매우 소중한 자산으로 다가온다. 요즈음도 야학 모임에서 보게 되는 야학 동기와 선후배, 같이 늙어가는 그때 그 학 생들이 그저 좋기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몇 년 전 수원 농생대 캠퍼스에서 야학 모임에 오랜만 에 참석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도 데리고 갔다. 이 전 모임에서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의 선한 모습과 바른 행동을 본 바가 있어서 우리 아들도 좀 보고 배우고 그들 과 같이 바르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이들에 게도 인격적으로 대하는 야학 선생님들을 만날 때 자존감 이 자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졸업생들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를 볼 때 더욱 “삶에 대한 바른 생각 과 자세”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나를 포함 야학에서 선생님을 지낸 많은 동문 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아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 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전혀 놀랄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삼일운동의 대 표자 33인 중 16인이 크리스천이고, 독립운동과 국민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야학 활동에 참여한 많은 분들이 크리스 천들이었고, 또 우리 서둔야학의 모체가 1954년 서둔교회 에서 세운 성경구락부(교장 김용준  장로)이기에 그 뿌리가 기독교와 연결되어 있음도 그러했다.
더욱이 농촌의 어린아이들을 무엇으로든지 깨우치게 하려는 교사들의 그 마음에는 그들이 인식하든 아니하든 사랑과 희생이라는 기독교 본연의 가치가 담겨 있고 학 생과 학생, 학생과 교사, 교사와 교사의 관계에서 그 가치 를 실현하는 터전을 서둔야학이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까 닭에 야학에서의 소중한 이 모든 경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임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 라 생각하며, 이 글을 통해 이러한 소중한 경험을 함께한 모든 분들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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