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DNA를 품고 살다 > 주요기사

본문 바로가기

Since 1948, www.snuagria.or.kr 페이스북아이콘트위터아이콘

주요기사

동창회보주요기사

동창회보

주요기사

상록그리고상록의아들 | 미련 DNA를 품고 살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4-21 17:46 조회1,824회 댓글0건

본문

 
상록 그리고 상록의 아들
 
미련 DNA를 품고 살다

                                                                                                      변득수(농교육 64)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3년 설날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날 이다. 설 쇠러 오신 백부께서 가정형편을 핑계로 입시공부를 안 하던 내 게 ‘등록금은 내가 마련해볼 터이니 공부를 열심히 하여 꼭 대학에 가 라’고 당부를 하시어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다.
 
1번 DNA:
나와 ‘상록’과의 인연은 부친이 “상록수”의 주인공 최영신이 개설한 샘골야학에서 공부하시면서 시 작되었다고 여겨진다. 6·25 때 국민병에 징집되어 고생 하며 걸린 결핵으로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고, 젊은 나이 에 홀몸이 되신 어머니는 독학으로 한글과 한자를 터득한 비문맹 여성으로 여러 부문에서 남들보다 반 발짝 앞서가 는 파워우먼이었다. 1남 3녀를 잘 키우고 가르치면서 재 산도 조금씩 늘려갈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으나 살림은 늘 궁핍했다.
그렇게 갑자기 입시 공부를 하려니, 부족한 게 너무나 많았다. 고민 끝에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하숙을 하면 좋겠 다고 말씀드리니, 위대한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으로 어머 니가 쉽게 해결하셨다. 한 달 하숙비가 쌀 4말이던 시절 우리 뒷집에서 수원으로 시집간 아주머니를 찾아가 주인 집 애들 3명과 한 방을 쓰는 조건으로 보리쌀 4말에 합의 를 하고 오셨다. 원서를 쓸 때가 되니 옆방에서 여고 3학 년 여동생과 자취를 하고 있던 임학과 복학생 노재후 선 배가 멘토를 자처하며 내가 생각하고 있던 한양공대 야간 을 다니는 것도 쉽지는 않을 테니, 농대에 새로 생긴 농교 육과에 응시해 보라고 한다. 앞으로 수업료가 면제될 예 정이고 100% 취업이 보장되는 유망한 학과라고 강하게 권유하여 실력 점검차 응시했다. 내 인생 전환점 일 년이 되는 설날이 합격자 발표날이 었다. 차례제사 모시고, 눈밭 산길을 헤치고 성묘한 후,
동네 어른께 세배를 드리고 나서 수인선 기차를 타고 발 표를 보러 나섰다. 합격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함께 시험 본 친구들이 궁금하기도 하고 나가는 길에 영화도 한 편 봐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서울대 합격이라는 내게 믿을 수 없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신체검사를 통과하고 등록안내서를 받아보니 수업료 면제다. 고마웠다. 나에게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큰 사건이었다.
만약, 수원에 법대가 있었거나, 노 선배가 의대생이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리고 백부님이 합격을 축하하며, 등록금으 로 1만 원을 주셨는데 고등학교보다 학비도 적어서 그 후 로는 등록금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2번 DNA:
수원 학생에게는 의무가 아닌 기숙사에 입 사비와 1개월 식대로 등록금과 맞먹는 3천여 원의 거금을 투자했다. 어려서부터 위험한 건 못하게 하는 외아들이 겪는 굴레를 벗어나겠다고 자주독립의 기치를 세우고, 속 칭 청와대(2동)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첫 만남의 인연 으로 박창서(화학) 형, 김영호(잠사) 형, 이희문(농경제)은 오늘까지 우정을 나누고 있고, 한 달 후에 영호 형과 교대 한 김중채(잠사)는 수원 여자를 맞아 가정을 이루고 잠업 시험장에서 자리를 지키다가 수년 전 위암으로 우리의 곁 을 먼저 떠나갔다(명복을 빈다). 그리고 1학년 1학기 개강 을 하면서 농교육과 동기 4명과 호매실리(칠보산 자락에 있 는 작은 마을)에서 중학과정 야학을 개설하여 열심히 봉사 활동을 했다. 수원의 ‘팔달회’는 4·19 시절 서울로 기차 통학을 하 던 서울대 문리대, 법대, 공대, 상대, 의대생들이, 불안하 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허전함을 추스르고 친목도 도모 하기 위해 모인 조용한 지역 동아리다. 우리끼리는 종합
상록 그리고 상록의 아들 미련 DNA를 품고 살다
변득수(농교육 64)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3년 설날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날 이다. 설 쇠러 오신 백부께서 가정형편을 핑계로 입시공부를 안 하던 내 게 ‘등록금은 내가 마련해볼 터이니 공부를 열심히 하여 꼭 대학에 가 라’고 당부를 하시어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다.
 78호   19
대학 형태를 갖춘 서울대학교 최초이자 유일한 조직이라 며 주요 무형자산으로 신주같이 받들었다. 4월 어느 일요 일 청계산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하니 10여 명의 선배들 이 유일한 신입생인 나를 극진히 환영한다. 버스로 동문 쪽에서 수지와 풍덕천을 거쳐 판교에서 내려, 30분쯤 가 니 청계산 입구다. 등산을 시작하면서 조무연(임학) 선배 가 청계산은 주변의 다른 산에 비해 월등하게 풍부한 식 물분포를 가졌다는 것과 등산로 좌우의 각종 식물 이름과 특징을 설명한다. 사이사이에 6·25 때 인민군이 후퇴하 면서 양민을 학살한 장소와 내용 등 역사적 사실까지 섞 어서 구수한 입담으로 명품 강의를 한다. 회원 중 홍일점 차혜영(치대) 선배를 빼놓을 수 없다. 수원에 이렇게 빼어난 미모의 여자가 있다니, 더구나 서 울대학생! 여유가 없던 시절이 라 준비된 술이 부족한데, 차 선배는 남자들이 작은 소주잔 을 들고 눈을 흘겨도 콜라 잔 에 모자라는 소주를 가득 받는 다. 나중에 구광수(잠사) 군과 처형/제부의 관계로, 치과 진 료를 하는 틈틈이 그림 전시회도 열고 국립극장 이사장을 세 번이나 연임하는 막강 지도력을 보여준 수원이 낳은 인물이다. 그 중 홍사영(농경제 60) 선배(1966. 2 졸업)는 본인 졸업 식에 참석하지 못한 채 3월 초 혈액암으로 별세하여, 팔 달회가 많은 참배객을 모시고 엄숙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49제를 수원문화원에서 지내고 그해 여름 홍 선배의 애 석하고 안타까운 삶을 기리며 묘지에 비석을 세웠다. 초 등학교와 고등학교 6년 선배이고 2년간 함께 기차통학을 하면서, 누구보다 모범적인 처신과 성실한 삶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런저런 사연을 가진 팔달회는 이어지지 못 하고 옛 멤버들끼리만 망년회와 번개 모임을 통해서 소식 을 나누며 지낸다.

3번 DNA:
기차통학 세 번째 날, 캠퍼스가 텅 비어 있 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학생들은 한일회담 반대 데모 를 펼치며 서울을 향해 가고 있고, 모든 강의는 휴강이다. 지각한 몇몇 학생과 시내버스를 타고 따라가는데 요금을 받지 않는다. 시위대 좌우에서 호위 형태를 취하던 경찰 관들이 안양경찰서와 경계선인 지지대고개에서 저지선을 쌓고 최루탄을 발사하니 대열이 흩어졌다.
군포를 지나다가 큰댁 철물공장에 들렸더니, 시골에서 쓰라고 못 등 철제 생산품을 싸주신다. 들고 오다가 안양 경찰서 소속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었는데 신발에는 흙 이 잔뜩 묻어 있고 못을 한 보따리 들고 있는 서울대 농대 생이다. 위험한 시위자로 오인되어 안양경찰서까지 호송 되어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이 군포 공장에 확인을 하고 나 서야 풀려났다.
농교육과 동기 2명을 포함해서 수많은 농대생이 옥고를 치른 사실은 7월 말 비상계엄이 해제된 후 학교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농대에서 이수한 순수농업 과목은 농장실습과 농 교육과 전공필수인 현장실습 두 과목이다. 현장실습으로 는 김재학과 함께 방학 중 4주간 경기도 능곡에 젖소 8마 리와 새끼 4마리가 있는 재학이 친구의 삼촌의 목장에서 하였다. 아침에 젖을 짜고 먹 이를 먹인 다음 소를 몰고 한 강 둔치로 나가 방목시키는 것 이 첫 임무다. 저녁에 짠 우유는 5Gallon 들이 Stainless Tank에 넣어 우 물물에 담가 놓았다가, 아침에 짠 우유와 함께 능곡역까지 자전거로 운반해 놓으면 우유 회사(서울우유 조합)에서 목장지역을 순회하며 우유통을 수거하고 중량교 처리장에서 통 단위로 단백질, 지방 함 량을 측정하고 변질 여부 검사 후 탱크에 저장을 한다. 그 중 한 달에 2~3회는 저녁에 짠 우유가 부패해서 불합격 되기도 했는데 냉장설비가 없던 때 얘기다.
일주일의 관찰기간이 지나서야 주인아저씨가 우유 짜 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실습을 시킨다. 숙달되지 않은 사 람이 젖을 짜면 젖이 유선을 역류하고 심하면 유선이 막히게 되어 유량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목장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분야가 출산인데, 전날 링거주사로 스태미너를 보충한 소가 산고를 시작하여 3 시간이 지나도록 송아지 발목만 조금 비친 상태에서 진전 이 없다. 아주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수의사와 귓속 말로 상의를 한 뒤 비상조치로 송아지 발목을 밧줄로 묶어서 우리에게 잡아당기게 하고 아주머니는 소가 힘을 쓰도록 응원을 하면서 그 리듬에 맞게 줄다리기를 지휘한 다.
어른 2인 1조가 교대하면서 2시간여 당기기를 계속하고 나니 그제서야 조금 움직이고 갑자기 쭈룩 쏟아지듯 밑으로 떨어진다.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고 환성을 올리고 있는데 아주머니는 송아지를 발로 걷어차고 집안으로 사 라진다.
그 시절 젖소가 부동산으로 분류되고 어른 암소 값이 100만 원, 암송아지가 20만 원, 수송아지는 4~5만 원에 팔릴 때이고, 아파트가 없던 시절 서울 집값이 50만 원 내외이던 때 얘기이니, 아주머니 태도를 이해하리라
. 이런 현장실습이 없었다면 농과대학에서 내가 배운 농업의 품격이 초라할 뻔 했다. 그리고 20여 년 후, 함안 농지개량조합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낙동강 제방은 일제 강점기 시절 중국 포로 를 동원해서 축조했으며, 국가관리 아래에 있는 모든 하 천의 제방은 사람과 가축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적발 시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조합장이 한다.
아뿔싸! 내가 20여 년 전 한강 제방에서 무슨 짓을 했던가!
범법행위를 4주간이나 반복하고, 목장의 범법행위에 동조한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깊이(!) 반성하였다. 양심선언을 했어야 하는데….

4번 DNA:
2학년이 되면서 농공 교육 전공을 선택하고 보니 1기인 63학번도 지원자가 없어 나 혼자 외롭고 어려운 개척의 길을 걸으며, 1호라는 특별함과 희소가치를 누리기도 했다.
공학 특성상 선행과목 이수학점이 많아져서 수강신청 때마다 신청 학점이 넘쳐 고재군 교수님의 허락을 받고 필수인 농업공작을 2학년 2학기에 미리 수강을 하고, 후에는 수강신청만으로 학점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졸업과 군 입대를 앞두고 학점을 확인하니, 농업공작이 F학점이라 졸업사정에서 탈락된다는 것이다. 성북동이던가, 교수님 댁으로 찾아뵙고 말씀드렸더니 ‘한 번은 remind를 했어야지!’ 하시며, 다음날 바로 고쳐주신 적이 있다. 지금도 아찔한 추억이다.
그리하여 나는 학사 편입을 하지 않고 두 학과의 동창을 겸하는 희귀한 예로 지금도 농교육과 동창회와 농공과 동창회를 오가느라 바쁘다.
 
30년 만에 최대 가뭄이라던 1965년 여름에는, 농교육과 1학년 10명을 주축으로 3학년 2명, 농가정과 학년별 1 명씩 4명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17명이 충북 음성군 맹동 면으로 농촌봉사를 갔다.
도착하던 날, 타들어가던 천수 답에 단비가 쏟아져 준비된 일정을 모두 미루고 모내기를 했다. 농사 경험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힘겨운 중노동이었으나, 야간일정을 생략할 수 없어서 강행군을 하고. 3일차 가 되니 낮에는 쏟아지는 잠과의 전쟁으로, 야간에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모기와의 싸움으로 모두 신경이 날 카로워져 작은 일에 목소리가 커지고 다툼이 되었다. 게다가 음성군수가 대접한 복숭아를 먹고 모두 설사를 하는 고생을 했으니 동원 대장을 맡았던 나는 후배들에게 저승 사자로 보였을 것 같다.

최상위 DNA:
그래도 나에게는 외아들에 씌워진 굴레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아, 부선망독자로 병역 면제자였지만 ROTC를 지원했다. 그러나 두 차례 하계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필답고사도 통과하고, 임관절차만 남아 있던 4학년 겨울방학, 사회에 바로 진출하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 같은 저울질에 경기도 병무청을 찾아가 임관을 포기하고 병역 면제받는 방법을 찾는 중에, 1·21 사태로 상담이 어려워져 중단하였다.
일명 김신조 군대라 부르던 ROTC 6기는 김신조 일 당을 통해서 입수한 북한군 훈련방식과 부대조직을 가르 치는 적전술 등 새로운 과목이 추가되었는데, 교육과정에 없던 과목의 추가로 교육기간 연장 또는 일부 과목 생략의 기로에서, 대한민국 장교의 필수 2주 유격훈련(일명 Ranger Course)을 생략하게 되었다. 전투병과 중 선봉인 보병장교가 유격훈련을 받지 않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또 하나는 복무기간(소집에서 소집 해제까지) 27개월 동안 늘 단독군장을 하고 두 다리에 1.5kg짜리 모래주머니를 차는 등 준비상태의 병영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재미 있는 것은 모래주머니 등의 효과가 없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면서 6기가 전역한 다음날부터 없어졌다고 한다.
 
마지막 하나는 기존의 나이정년 체계에서 계급정년과 진급정년제를 병행하면서 발생한 위관장교(중위와 대위) 공동사태를 해결하는 조기진급과 임시진급제도를 실시했는데, ROTC 장교만 제외하는 어처구니없고 치사한 차별을 했다.
부작용이 심하여 ROTC 7기부터는 차별화가 없어졌고, 그때 79연대에 배속됐던 ROTC 6기 9명은 일 년에 2번씩 만나 40여 년간 같은 레퍼토리로 허리를 움켜 잡으며 또 웃는다.
 
1993년부터는, 농대 선배들과 골프를 치던 중에 ‘비전공 분야에 종사하며 고생하는 사람들이 동병상련하고 어려울 때 십시일반할 수 있는 골프모임’을 만들자고 하여 김진의(축산) 선배를 초대 회장으로 모시고 10명의 창립 회원이 ‘청록회’를 발족하여 내가 총무를 맡아 10여 년간 을 이어오고 있다.
작년 2014년에는 입학 50주년 기념 부 부동반 해외여행도 다녀왔고, 어떤 팀은 50주년 기념 국토 순례를 했고, 금년에는 신년인사회를 주관했다. 아직도 거쳐야 할 절차가 또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