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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그리고상록의아들 | 서울대 농대 축구부, 아쉬운 몇 년의 준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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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4-08 17:50 조회2,5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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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농대 축구부, 아쉬운 몇 년의 준우승
 
 김성봉(농생물 54)
 
[지난 호에 70년대 이후 축구부 동아리에 대한 글을 읽은 김성봉 동문이 다른 시대 축구부에 대한 추억을 전해달라는 글을 읽고 보내온 글입니다. 김성봉 동문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농대 축구선수였으며 4학년 때는 체육부장을 지내고 졸업 후에는 농촌진흥청 원예시험장에서 38년간을 근무를 하면서 제주 감귤연구소 소장, 과수연구소 소장, 초대 원예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입학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업을 마치고 5, 6명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교문 밖으로 걸어가는데 운동장 쪽에서 누군가가 ‘김 형’하고 부른다.
내가 아니겠지 하며 계속 걸어가는데 재차 부르기에 뒤를 돌아보니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다가가니 본인은 농학과 3학년 강태수인데 충북 제천농고 축구선수 출신으로 농대 축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다며, 나를 잘 아신단다.
나는 그 형을 전에 본 일도 없고 모르는 사람이라서 ‘저는 형을 전혀 모릅니다.’ 하였더니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하시며, 축구를 좋아해서 수원에서 열리는 전국 축구대회, 경기도 축구대회, 수원시 고교 축구대회를 빠짐없이 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수원고등학교의 유명한 축구선수 라이트 이너(R I.)로 골 잘 넣는 김 형을 잘 알고 있으니 내일부터 방과 후에 같이 운동을 하자고 권하신다.
 
 나는 바로 못하겠다고 사양을 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때 코치 선생님께서 학업에 지장이 되니 한 번만 출전을 하라고 하셨으나 대학 입시준비를 하는 중에도, 졸업할 때까지 선수생활을 하게 되면서 대학 진학에 많은 지장을 주었기 때문이다.
대학 입학 후에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서 축구를 하지 않기로 결심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후 강형께서는 운동장에서 나를 만나려고 며칠씩이나 기다렸다며 반가운 표정으로 손짓을 하시며 부르신다.
형의 성의에 못 이겨 앞으로 다가가니, 대학교에서 운동하는 것은 사회 진출에 아무 지장을 주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같이 운동을 하자고 하신다.
그렇다면 축구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 날부터는 방과 후에 운동준비를 하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강태수(농학 52), 손성철(농생물 53), 박화춘(축산 53), 이희철(농경제학과 54) 형들과 축구를 하게 되었다.
 
4월 상순경이 되어 교내에서 신입생 환영회로 학과별 대항전 체육대회가 열렸다.
경기종목은 축구, 배구, 농구, 정구, 탁구이며 시합은 방과 후에 대진표에 의해 학생들이 진행하였다. 나는 과대표로 축구, 배구, 농구, 탁구 선수로 출전을 하였으나 2주간에 걸쳐 열린 경기에서 우리 학과는 우승을 하나도 하지 못한 채로 끝이 났다.
이 시합 중에 강태수, 손성철, 박화춘, 이희철, 그리고 나는 축구심판을 보면서 과 선수 중 잘하는 사람을 눈여겨보아 선수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선발된 선수가 김중경(농생물학과 54), 심우식(임학과 54), 강현선(농공학과 54), 중교생(농과대학부설 중등교원양성소 학생) 4 등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방과 후에 운동장에 모여서 강태수 형의 지시에 따라 연습을 했다.
강태수 형은 포지션이 센터 하프로 경기장 중앙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다. 몸은 호리호리하면서도 동작은 빨라서 완전 방어벽 같은 수비를 하였다.
그리고 제천농고의 축구팀 대표선수로 전국대회에 출전한 경력이 있는 우수한 선수였다.
 
54년도 문리대운동장 준결승전 사대에 승리
 
 
                55년도 서울대체육대회 결승전에서 사대에 졌다
박화춘 형은 광주제1고등학교 축구선수 출신으로 레프트 이너로 키도 작고 몸은 왜소하지만 침착하고 공을 다루는 솜씨가 좋아서 절대로 공을 뺏기지 않았다.
나와 동기인 이희철은 대천농고 축구팀 대표 출신으로 축구선수로서의 체격을 완전하게 갖춘 선수로 센터 포드로 활약하였고, 서울대학교 축구팀 대표 선수로도 활약하였다.
또 다른 동기 정봉조(농생물 54, 작고)는 동래고등학교 때 유명한 야구 선수 출신으로 키도 커서 골키퍼를 맡아 공을 잡으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 철벽 수비를 하였다.
 
김중경과 심우식은 경상도 사나이들로 황소같이 저돌적으로 덤비며 라이트 백과 레프트 백으로서 상대방 선수가 부딪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늘 공을 빼앗아 왔다.
강현선은 전라도 사나이로 곰같이 우직하고 힘이 장사여서 레프트 하프 위치에서 90분 동안을 지치지 않고 뛰었다.
문병원 후배는 진주농고 축구선수 출신으로서 레프트 윙을 맡아 절대로 몸을 다치지 않았고 공을 차는 기술이 신사같이 깨끗한 공을 차고 또 라인을 따라 공을 쭉 끌고 가다 센터링하는 재주가 절묘하였다.
신건철 후배는 경기고등학교 시절 등산반에서 활동하여 남이 못 올라가는 위험한 곳을 잘 올라가는 학생이었다.
과 대항전에서 눈에 띄어 선발된 선수로 라이트 하프로서 운동장 전체를 휩쓸고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는 무쇠 같은 체력을 지닌 선수였다.
대학 본부에서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및 전국 남녀 고등학교 체육대회를 5월 1일 개최한다는 공문이 왔다. 경기종목은 각종 구기 및 육상 각 종목이다.
우리 축구부는 10일간의 합숙 훈련을 하기로 하고 학교 인근의 개인 주택을 통째로 빌려 합숙 장소로 정하고 식사는 학교 구내식당에서 하기로 했다.
합숙 첫날, 4학년 선배 두 분이 계신데 한 분은 거창 씨름선수 출신이고 또 한 분은 산청에서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잡는다는 장사로 소문난 분이어서 체력들이 좋고 힘도 쓸 것 같은데 사범대학과 공과대학 축구부와의 경기는 무척이나 겁을 먹고 떨고 계셨다.
매년 이 대학들과 시합을 하면 패해서 이들과 대항하게 되면 무조건 지지 않을까 겁을 먹고 있었으므로 처음으로 경기에 나서는 1학년인 우리들은 덩달아 공포심이 들어 같이 떨고 있었다.
합숙 일과는 아침 운동은 6시부터 8시까지, 저녁 운  동은 방과 후에 공부를 끝내는 대로 하기로 하였다.
합숙하면서 식당에서 보통 학생들은 비싸서 못 사먹는 음식인 돈가스를 먹는 날은 맛도 좋지만 일반학생들에게 우쭐해하기도 했다.
아침 운동을 할 때는 잠업시험장 견사공장에 다니는 여직공들이 운동장 옆을 지나 출근을 하는데 공을 주워 주고 가는 여직원들을 보는 재미로 공을 잘못 찬 듯이 형들이 밖으로 차 내보내기도 했다.
 
하루는 저녁 늦은 시간 합숙소에 임학과 교수이신 이창복 교수님이 찾아오셔서 교수님도 고농 때 축구선수를 지냈으며 일본 학생들과 시합을 하면 늘 이겼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고 가셨다.
또한 오후 연습을 하고 있으면 농공학과 박성우 교수님께서 가끔 구경을 오시는데 축구선수들에게 통계학은 무조건 C학점을 주겠으니 열심히 운동을 하라고 껄껄 웃으며 격려를 해주셨다.
통계학은 2학년 필수과목으로 학점을 따야 졸업이 되는데 시험을 치고 보니 재시험을 보라는 통지가 와서 재시험을 보고서야 C학점을 받았다.
축구부는 무조건 C학점을 준다던 교수님의 말씀은 순 뻥이었던 것이다.
우리 농대 3대 뻥쟁이 교수님 중 한 분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고마운 분들이었다.
 
또 농생물학과 조재영 교수님께서도 연습장에 들르셔서 고농 때 김 군의 포지션에서 뛰었다고 하시며 꼭 우승을 하라고 격려해주시고 가셨다.
조재영 교수님의 유전학 강의는 명강의로 유명했는데, 강의 내용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강의 시작 벨이 울리면 강의실에 들어오시고 끝나는 벨이 울리면 강의실을 정확하게 나가시는데, 1년 수강하는 동안 한 번도 어기지 않으셨다.
드디어 시합 날이 다음 날로 다가왔다.
시합 장소는 동숭동 문리대 운동장이었는데 수원에 있던 우리는 전날 서울로 올라가 종로5가 여관에서 자고 출전을 해야 했다.
서울대 각 단과대학 선수와 응원을 하러 온 학생들, 그리고 전국의 고등학교 남녀 선수들과 같이 온 학생들까지 우글대니 수많은 인파로 설 자리도 없고 정신도 없었다.
서울 이화여고를 상대로 경남 남성여고 배구 팀이 이기는 경기를 구경하며 기다린 끝에, 우리는 첫날 법대 축구팀에게 승리를 하고 오후에는 수의대와의 준준결승전에서 또 이겨서 다음날 준결승전으로 공대와 시합을 하게 되었다.
선배님들이 벌벌 떠는 대전이었으나 우리 1학년들은 열심히 뛰어서 공대를 물리치고 결승에 올라갔다.
 
다음날 열린 결승전에서는 사대에 아깝게 2:1로 패해서 준우승을 했으나, 학교에 도착해서는 열렬한 축하의 환영식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55년에는 준결승전에서 사대를 꺾고 결승전에 갔으나 공대에게 패해서 또 준우승을 하게 되었고, 1956년과 1957년도에는 준준결승전에서 패하여 더 이상 경기를 치르지 못하였으니 졸업할 때까지 우승을 한 번도 못해보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아쉬운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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