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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뵙고싶었습니다 | 나와 농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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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4-08 11:34 조회2,4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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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농대의 인연
한규진(농화학 50)
 
 
한규진 동문님은 2014년 이현수 동창회장이 미주 농생대 동창회를 순회 방문 시 밴쿠버 동창회에 참석하시면서 동창회비를 직접 전달하시는 등 농대와 동창회에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농대에 진학하신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나는 원래 서울의대를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배재중학교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있는 Chapel 시간에 정일형 박사님께서 “여러분이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겠다면 농산물 증산을 위해 노력하라”면서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빈곤한 나라들의 실정을 자세히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농대에 진학했습니다.
1950년 6월12일에 대학 입학식을 하고 그 다음날부터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6월 26일 아침 서울역에서 수원행 기차를 기다리는데 남쪽으로 가는 기차는 없고, 군인들을 잔뜩 싣고 열차들이 북쪽으로만 가고 있어 이제 학교도 못 가는구나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9•28 수복 후 후방근무가 가능하다는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한강다리를 건너 인천으로 가서 LST에 몸을 싣고 3일 만에 부산에 도착한 뒤에도 육군 제2훈련소까지 밤새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학도병이라고는 해도 항의를 하다가 기합도 더 받고 힘들어, 다시 2년제 육군군악학교를 마쳤으나 제대가 언제 될지 예측할 수 없어 장교로 근무하기 위해 육군보병학교와 육군병기학교를 마쳤고, 병기장교가 될 즈음 휴전이 되었습니다.
 
휴전으로 사병들은 제대가 시작되었는데 나는 다시 장교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임관되고 7개월쯤 되어 육군본부에서 영어로 실시한 미국육군병기학교 유학시험에 서울 공대 전문부 화공과 졸업 1명, 서울 공대 화공과 4학년 1명, 서울 농대 농화학과 신입생 1명, 하우스보이 출신 1명 등 총 4명이 선발되어 1954년 8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교육을 받고 돌아와 육군병기학교 교관으로 근무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대학 재학 중 입대한 장병들을 위해 단기교육과정으로 1956년 국방부 전시연합대학을 구성하여 서울대 교수들이 강의를 하였는데 농대에서는 비료학의 이재현 선배님, 토양학의 오왕근 선배님이 가르치셨습니다.
미국 유학을 한 까닭에 나는 학창복귀 제대가 안 된다고 하여, 결혼비용, 학비 등 필요한 돈이나 벌자 하고 2차 도미 길에 올랐습니다. 한번 갔다 온 덕에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여 미국을 다녀오고 1958년에 복학하니 전시연합대학을 함께 다니던 동문들이 수학하고 있어 매우 반가웠습니다.
 
학창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무엇입니까?
학교기숙사에서 마지막 1년을 지내며 후배들과 음악감상회(MLS)를 조직하여 월 1회 음악 감상회를 열었던 일입니다. 한상주, 박태준, 강익진, 구윤서 동문 등이 봉사하며 매우 재미있게 진행되었고, 그 외 여러 학우들도 오페라 한국어 가사를 구해주면 밤새 200부씩을 등사해서 나누어 주며 함께 즐거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졸업 후에도 가끔 참석했던 모임에서의 추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60년 10년 만에 졸업을 하고 김재욱 선배님 소개로 한진농약에 취업은 했으나 4•19 이후 회사 경영이 어려운 상태였으므로 나는 집사람이 운영하는 약국을 같이 돌보다가 주한 미해군사령부 소속 번역관으로 일을 하면서 회사는 일이 있을 때만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5•16이 일어나고 공보부 영문번역관에 응시, 선발되었으나 근무한 지 한 달 후쯤 중농정책이 발표되며 한진농약이 육일물산으로 바뀌고 복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962년 초 육군기술연구소의 이용균 선배가 함께 하자고 제의하여 대학원 논문도 준비할 겸 화학분석실 주임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번역을 계속하였습니다.
3~4년을 그리 하니 심장판막증이라는 그 당시 처음 듣는 병에 걸려 의사의 충고로 두 직장을 다 그만두고 새로 시작하는 삼진농약에 입사하니 그 사이에 농약회사들의 여건이 많이 좋아져 있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오랜 기간 지내셨지요?
1965년 11월 약사회지에서 캐나다와 뉴질랜드에 진출할 수 있는 정보를 보고 넓고 자원이 풍부한 캐나다를 택하여 우리 내외와 2남 1녀가 밴쿠버에 짐을 푼 때가 1967년 1월이었습니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우편과 전화로 농약회사 이곳저곳을 알아본 지 일주일 만에 Later Chemicals Ltd. 농약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벤쿠버 국제공항이 있는 리치몬드 시에 위치하여 농약, 비료 혼합생산을 하고 있던 회사는 버스가 2시간마다 한 번씩 다니는 농장지대에 있었는데, 그 주변 농장주의 대부분은 중국인들로 영어교육 받은 10대 자녀들이 주로 주말에 농약을 사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토요일 오전만 판매를 하고 있었으므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도 자진 출근하여 판매 업무를 돌보았습니다.
 
또 정원사의 대부분은 영어가 잘 안 되는 일본인들이어서 내가 일본인 정원사협회에 임원으로 가입하여 그 회원들을 전부 고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월급도 회사에서 올려주고, 주중에 자유로운 외출, 업무용 차량지원 등이 되었으며, 오페라와 심포니 연중 회원권을 받아 은퇴할 때까지 우리 내외와 친구 내외가 문화생활을 즐겼습니다. 그 리치몬드의 농장과 농약회사는 지금은 다 사라지고 중국인들의 비즈니스센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하면서 취업 1년 후에 시험 볼 자격이 주어지는 Professional Agrologist 자격시험에 첫 시험은 실패하고 6개월 후 재시험에 통과하여 P. Ag.라는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저 외에 한국인으로서 농업기술사 자격을 소유한 분은 중앙대 농대 학장을 지내신 백인기 동문으로 기억합니다.
 
입사 5년 만에 주가를 4배로 올려놓고 총 20년을 근무하였는데, Premix를 사용하거나 완제품을 판매하던 것을 이스라엘의 맥타심 빌쉬바에서 원료를 직접 구입, 제조하여 생산원가를 20~30%로 낮추어, 경쟁사 Chevron도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고, 기타 큰 회사들이 지사를 타 도시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캐나다에 잘 적응하고 일을 잘하게 된 데에는 1970년대 초반에 이미순(농학 56) 동문과 연락이 되어 많은 도움을 받은 덕도 있습니다.
 
은퇴 후도 쉬지 않고 활동을 하셨지요?
1978년 IUPAC가 주최하는 스위스 취리히 국제농약학술대회에 참석해서 국제무대에서 봉사할 자신감을 얻어 지원하여 자격을 얻고, 직장에서 은퇴한 1987년부터 1990년까지 UNIDO와 기타 국제기관의 농약기술 자문위원으로 에티오피아, 수단, 인도, 인도네시아, 남미, 동남아, 중국 등에서 봉사하였고, 1990~1992년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에 있는 Reserch Laboratory(주로 소독약, 농약, 화학약품 등)에서 근무하였습니다.
 
나의 국제기구 첫 프로젝트는 1984년 UNIDO(유엔공업개발기구)가 수단에서 실시한 “The Feasibility to set up a Pesticide Formulation Plant in Sudan”로서 ‘내가 이제 어려운 민족을 위해 이 중대한 일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90일 동안 40~50도의 더위도 못 느끼며 모기도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 지금 생각해도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그 후 에티오피아 농약공장 설립 국제입찰 UNIDO 프로젝트를 수행하려고 아디스아바바 비행장에 내리면서 고도 3600미터를 처음으로 느꼈고, FAO 기술자문으로 와있던 최상균(농공 51) 동문을 만나 손수 애써가며 준비한 한국 음식을 여러 번 대접도 받고, 구윤서 동문이 봉사하고 돌아갔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그 신세는 전혀 갚지 못한 채 지금도 서신왕래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서 온 농업기술고문관을 우연히 만나 같은 한국말과 같은 전공 분야로 반가움에 몇 시간을 이야기했는데, 다음에 찾아와서 농업기술서적을 부탁하여 프로젝트가 끝나면 전부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나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근무시간이 끝나고 호텔에 돌아가도 해는 중천에 있어 호텔 옆 가게에서 국산 포도주가 한 병에 3달러, 빈병을 주면 2달러를 돌려주어 한 병에 1달러인 셈인데, 그 포도주가 맛이 좋아 3개월을 내내 마시며 주량이 늘고 혈압이 올라 고생을 좀 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로젝트도 무사히 끝내고 다시 인도네시아의 강용 농약 제조공장 설립과 브라질 농약배합공장 설치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중국 사천성에 비료배합기술 전수를 하러 갔을 때는 연구소장이 쳉두 공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왔는데 캐나다 마니토바대학에서 조재무 교수를 지도교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여 더욱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사천대학 부속 외국인 숙소에 묵으려고 차에서 내리니 국제 프로젝트 때마다 묵었던 고급호텔들과 내심 비교가 되어, 내가 어느새 물질에 물들어 있음을 반성하였고 그 기숙사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 교수, 나 같은 기술자문 등 클래스와 타이틀도 다양하였습니다.
  중국어를 배우러 온 한국 학생이 제일 많았고 아프리카와 일본에서 온 사람도 있어 다양한 음식이 있었는데, 늘 좋아하는 매콤한 사천음식만 먹었더니 어느 날은 식당 매니저가 “당신이 돈 내는 것도 아닌데 왜 싸구려만 먹느냐?”라는 불평을 다 하더군요.
 
 또한 주말이면 관광을 시켜주어서 한번은 그곳에서 가까운 티베트 여행으로 라사비행장에 내려 밖으로 나가니 스피커에서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울려 퍼지는데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듣기에는 좋았고, 7명이 예약했으나 모두 취소하여 가이드 외 나 혼자 여행한 3일은 겁은 났으나 매우 즐겁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임무를 끝내고 북경에서 집사람을 만나 일주일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오니 역시 내 집이 제일임을 느꼈습니다. Home Sweet Home.
 
 
 옛 학우들과 교류는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내 졸업 축하 MLS 모임에서 강익진 동문이 바이올린 독주를 해준 것을 반세기 넘도록 잊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도 피지에서 매일 이메일을 보내주십니다.
20여 년 전에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위치한 미-캐나다 국경의 다리에서 유학 중인 장남을 방문한 이용균 선배님을 만나 하룻밤을 함께 지냈고, 그 후 로키 여행 중 밴쿠버를 방문해준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외에도 복학동기들과는 거의 매주마다 전화를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인연이란 끝이 없나 봅니다.
 
이재현(농화학 46) 박사, 김질필 사장, 그리고 연창무(농화학 56) 동문, 강영규(농화학 51) 동문, 유재윤(농화학 58) 동문, 최영일(농화학 46) 선배, 김문규(농화학 49) 선배, 김교창(농화학 53) 박사, 정동효(농화학 54) 박사, 주학윤 박사 등이 캐나다에 오시면 연락을 주어 저를 찾아주셨습니다.
조재무(농화학 49) 박사님은 1970년 쯤 매니토바 주에서 비료 시험에 대한 연구발표하실 때 만나고 그 후 리치몬드로 오시어 비교적 자주 뵙고 있습니다. 홍순철(임학 49) 선배와는 매달 2~3회씩 만나고 있고 그 외의 동문들과도 가끔 만나 안부를 묻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전 통일부장관 허문도(축산 74) 동문이 나를 찾았으나 어긋나고, 전 농림부장관 김성훈(농경제 58) 동문은 이곳에 올 때면 만나곤 하는데 매우 고마운 동문들입니다.
 
 1992년에는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밴쿠버 지부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어, 1966년에 한인 이민 역사의 1세대 선두주자로 캐나다 밴쿠버에 정착한 이래 흩어져 있던 서울대학교 동문들을 규합하여, 동창회 지부를 결성하고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1992년부터 2012년까지 20년 동안 Vancouver Downtown Senior Center에서 Opera Appreciation Program(오페라 감상), 세미나를 위한 Information & Referral Service, 영어 강습 등으로 풀타임 봉사를 하였고 특히, 2014년 7월까지 클래식 음악 감상법을 강의하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근래에는 건강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교의 발전과 동문들의 건강과 성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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