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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수필 | 의사와의 대화 ‘미처 보지 못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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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3-17 11:30 조회1,5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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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의 대화
‘미처 보지 못한 것들’
 
 
 
 

박평일(농경제 6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몇 주 전에 담당 의사인 닥터 네논을 찾아가 1년 만에 정기검진을 받았다. 나는 의사, 변호사, 회계사, 목사, 이발사 등 소위 끝에 ‘사’가 붙은 직업인들과의 관계는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좀처럼 바꾸지 않는 소심한 성격이다. 그런 내가 20년간의 인연을 정리하고 5년 전에 담당 의사를 닥터 네논으로 바꾸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애창곡으로 알려진 가수 김수희의 ‘애모’라는 유행가에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하는 노랫말이 나온다. 나도 나이가 들수록 앞에만 서면 왠지 작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내와 의사다.

아내는 그녀 앞에서 “애모”를 부르며 어느 정도 얼버무릴 수가 있다. 그러나 의사들만큼은 여태껏 그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별 방도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혹시 불치병이라도 선고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의사들 앞에만 서면 나도 모르게 ‘예스맨’으로 작아진다.

나는 혈압이 정상수치를 약간 웃도는 것 외에는 건강상 별다른 이상(?)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검진을 받을 때마다 복용해야 할 약의 종류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터인가 각종 비타민을 포함해서 15개가 넘어갔다. 물론 나의 건강을 위한 처방이겠지만 혹을 떼러 갔다가 오히려 혹을 하나 더 붙이고 돌아오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내 건강에 과잉 관심을 보이는 아내, 그리고 그녀의 철저한 신임을 받고 있는 담당 의사의 명령(?)에 반기를 들만큼 나는 간이 크지 못하다.

암튼 매일 저녁, 케롤이 약봉지와 물컵을 손에 들고 지켜보는 가운데 반강제로 입안에 알약들을 털어넣을 때마다 정말 죽을 맛이다.
 
몇 년 전 인터넷에 미국인들 사망률 1위 질병이 심장병이고,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사망자들의 숫자가 그보다 많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그 기사를 무기로 케롤을 어렵게 설득해서 담당 의사를 노년층 상대 전문의사인 닥터 네논으로 바꿔보기로 했다.

그는 첫 검진을 마치고 넘겨받은 내 병원 기록을 검토한 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빌, 당신의 현재 건강 상태로는 굳이 3개월마다 정기검진을 받을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년에 한 번씩 간단한 검사를 받아도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으니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가웠다. 그에 더해 그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데다가 인상도 따뜻하고 포근해 보여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는 검진을 끝내고 나면 건강에 관한 이야기 외에 나의 일상생활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자신의 사생활 이야기들을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듯 허물없이 나에게 털어놓곤 한다.

이번 검진을 끝내고도 “빌, 작년에 비해 건강상 변화는 없습니다만, 얼굴이 예전에 비해 어두워 보이는데 무슨 근심 걱정거리라도 있습니까?” 하고 물어 “잘 보셨습니다. 사실은 은퇴를 앞두고 자꾸 삶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어서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알만 합니다. 은퇴 병을 앓고 계시는군요. 대부분 미국인들이 은퇴 시기에 겪게 되는 전형적인 은퇴 증후 현상입니다. 의사인 저도 지금 그런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그는 역시 대화를 편안하게 풀어나가는 사람이었다.

“닥터 네논은 의학적으로 적당한 은퇴 나이를 몇 살로 보십니까?” 내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 질문들을 은퇴를 앞둔 환자들로부터 자주 듣고 있습니다. 저는 일정한 은퇴 나이는 없다고 봅니다. 사람에 따라서 50살에 은퇴할 수도 있고 100살까지 일할 수도 있습니다. 그 시기의 판단 기준은 나이가 아니라 현재 종사하고 있는 자신의 직업을 얼마나 좋아하고 즐기고 있느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 생각에는 하고 있는일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것을 은퇴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얼마 남아 있지 않는 여생을 굳이 싫어하는 일을 계속하며 불행하게 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100%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나같이 경제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이민 1세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막상 은퇴하려고 하니까 경제적으로도 너무 준비가 없는 것 같아서 주저하게 됩니다.”
 
“경제적인 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생활 규모를 줄이는 수밖에 없지요. 저는 5년 후에 은퇴할 계획으로 몇 년 전부터 살림규모를 줄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벌써 1년 전에 옛 큰 사무실을 정리하고 작은 사무실로 옮긴 것이 기억났다.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富라는 것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必要한 것이 얼마나 없느냐’가 결정한다는 말이 귀가 아프게 들어왔다.

내가 가깝게 지내고 있는 지인들인 뉴욕 돌섬 이 목사, 그리고 버지니아 T선배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두 분은 다 빈손으로 은퇴를 했다. 그러면서도 천하를 모두 소유한 듯 하루하루 삶을 유유자적하고 행복하게 일궈가고 있다. 한 분은 파킨슨씨병, 다른 한 분은 뇌경색증을 앓고 계시면서도.

“그런데 저는 은퇴를 계획하면서 고모와 고모부를 생각하면 자꾸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는 듯 대화를 이어갔다.

“고모와 고모부가 아주 훌륭하신 분들이었나 봐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고모 클레어와 고모부 에릭은 이 세상에 맹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맹인학교 OVEBROOK에서 만나 몇 년간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했습니다. 고모부는 사회봉사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죽을 때까지 봉사 활동을 하다 돌아가셨고, 고모는 피아노를 전공해서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연주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 모두 노후 마지막 시간까지 자기들의 직업을 즐기시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가신 분들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고모집에서 방학 기간 거의 대부분을 보내곤 했습니다. 의사 아버지의 부탁도 있었지만 내가 스스로 택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생애에 그때처럼 행복했던 시절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모집
안 분위기가 그렇게 포근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습니다.”

닥터 네논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며 행복했던 어린시절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그의 유난히 따뜻하고 포근한 성품이 고모와 고모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은 40년 이상 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모부가 80세에 먼저 세상을 떠나셨고, 다음 해에 고모도 고모부를 뒤따라 가셨지요….” 그의 얼굴에 슬픈 그림자가 잠시 스쳐갔다.

“사랑하는 부부는 한 배우자가 죽으면 다른 한 사람도 곧 뒤따라 죽는다.”고 하는 옛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인가 봐요.” 내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나는 고모 장례식에 참석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내내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그때 옆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고모 친구분 중 한 분이 나를 껴안으며 나에게 건넸던 위로의 말을 평생 잊을 수가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데요?”

“프레드릭, 너무 슬퍼하지 마라. 네 고모 클레어에게는 오늘이 가장 기쁜 날일 거야. 살아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편 에릭의 얼굴을 천국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는 날이니까. 그동안 클레어와 에릭은 사랑하는 서로의 얼굴을 두 눈으로 얼마나 직접 확인하고 싶었겠니? 오늘이 두 분의 그 평생소원이 성취되는 날이 아니겠어?”
 
 
에필로그
밖에는 여름 장대비가 사정없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집을 향해서 운전대를 돌렸다. 와이퍼를 최대 속도로 움직여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옆자리에 앉아 비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케롤에게 물었다,

“당신은 천국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해?”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헬렌 켈러가 말했었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오늘 닥터 네논의 고모 이야기를 듣고 깨달은 게 있어.

이 세상에서 미처 보지 못한 것, 볼 수 없었던 것들, 만질 수 없었던 것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볼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것이 사랑이 아니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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