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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 그리고 상록의 아들 | 학장배 야구대회 우승감격과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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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12-24 15:38 조회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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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장배 야구대회 우승감격과 유감
김기선(원예74)
 
요즘 우리나라의 입시제도는 너무 자주 변해서 학부모와 학생들이 대입준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 때 대학입시는 지금보다는 변화가 좀 덜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시험치던 1974년부터 서울대에서는 처음으로 계열별 입시가 시행되었다. 나는 고3 여름방학때 고교선배들의 소개로 조경과 원예에 관심을 갖게 되어, 310명을 뽑는 농학계에 지원하여 3.4:1의 경쟁을 뚫고 합격을 하였다.
 
1학년 때 당시 화훼학 교실 박사과정이던 고교선배 김일중(농학67, 전 제주대 교수, 1981년 작고)형께서 원예학과에 와서 조경과 잔디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조언에 따라 원예학과를 지원하게 되었다. 우리 동기는 원래 정원은 20명이었으나 1학년 때 군대나 휴학 등으로 인원이 감소하여 17명이 진입했으나 2학년 다니던 중에 한명이 고대 의예과로 가는 바람에 16명이 다니게 되었다(권용덕, 주영규는 군대 다녀온 후 원예학과에 진입). 원래 73학번으로 수의과에 입학했으나 전공을 변경한 황명호와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71학번 이용우, 이철순, 72학번 이기룡, 송세경, 김의장 등 선배들과 같이 수업을 들었다.
 
원예학과는 학과 이미지로 보나 역사적으로나 운동하고는 별로 관련이 없는 과인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입학동기에는 야구명문 경북고출신이 4명(서보환, 엄붕훈, 정혁, 우종규), 경동고 출신이 2명(최중진, 최인석)이 있는데다 복학한 이용우 선배 역시 경동고출신의 야구광이셨다. 1975년 학장배 쟁탈 과대항 야구대회가 열렸다. 이용우(71), 심상렬(73) 선배를 빼고는 전부 74학번(김기선, 서보환, 엄붕훈, 우종규, 정혁, 최중진, 최인석) 위주로 구성된 원예학과 야구팀이 탄생했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첫 상대가 전년도 우승팀인 농화학과였다. 열심히 연습하고 대회에 출전하였으나 첫 경기다보니 1회 초에 실수 연발로 무려 5점이나 내주고 시작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꾸준히 상대를 위협하며 쫒아갔다. 나는 처음만 투수를 하고 원래 내 포지션인 포수를 보았는데 뱃터 박스에 들어서는 농화학과생들이 당황해하며 신생 원예학과에 역전패당하면 큰 망신이라며 똑바로 하라는 식으로 서로 말싸움하던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결과는 아쉽게도 6:8로 패하였다. 만약 7회가 아니라 9회까지 했더라면 아마도 역전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를 어렵게 이긴 농화학과는 결국 우승을 했다. 우리의 선전을 보신 당시 학과장이셨고 운동에도 팔방미인이셨던 표현구 교수님은 수고가 많았고 잘 했다고 자랑스러워하시며 나중에 야구세트 일체를 사 주셨다.
구반포에서 운동구점을 하던 가까운 친척을 통해 싸게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절치부심의 1년이 지나고 1976년, 드디어 과 대항 야구대회가 다시 열렸다. 지난해를 교훈삼아  열심히 연습했던 우리는 마침내 우승을 했다. 당시 농대 야구부 주전투수인 75학번 김종기(현 중앙대 교수, 현재 한국원예학회장)가 2학년 올라오면서 원예학과로 진입하여 합류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원예학과 창설이후 구기 단일종목 우승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류달영, 표현구, 고광출, 이병일, 염도의 당시 교수님들의 감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감격의 일년이 지나고 1977년 다시 과 대항 야구대회가 열렸다. 작년 우승팀이자 농대야구팀 주전 투수와 포수를 지니고 있던 우리의 우승은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었다. 무난히 결승전까지 오른 우리는 작년에 우리에게 4:1로 패해서 준우승에 머물렀던 조경학과와 마주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게임을 주도하면서 4점 이상 앞서가고 있었으나, 후반부에 갑자기 기세가 조경학과 쪽으로 기울면서 결국 4:6으로 역전패 당하고 말았다. 결승전 당일 주전 2명이 개인사정으로 뛰지 못한 원인도 있었고, 상대방의 타구는 빗맞아서 계속 안타가 나오는 반면 우리는 우익수 쪽으로 안타를 치고도 1루로 달리다가 넘어져 우익수가 1루로 던진 볼에 죽어 추가 득점에 실패하는 등 불운이 겹쳤다.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해 하는 우리들을 향해 열심히 잘 했다고 도리어 웃음으로 독려해 주시던 표현구 교수님 생각이 난다. 내가 교수로 부임해 처음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당시 학과장이던 이병일 교수님이 신임교수인 나를 소개하면서 내가 얼마나 훌륭한 인격과 학문의 소유자인지의 소개는 다 빼고(^^) 내가 옛날 원예학과 야구우승의 주역이었다는 것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 동기들은 운동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소질을 발휘했다. 내가 과 회장으로 있던 1976년 농대 축제기간 중 과 대항 촌극대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내숭떨기 좋아하는 농대 특성상 모두 꺼려해서 농학과, 식품공학과, 그리고 원예학과 총 3과만 참가했는데, 농대 강당을 꽉 메운 관중 앞에서 촌극을 하는 것이었다. 이용우 선배를 비롯하여 우리 동기 두 여학생 등 여러 명이 무대에 올라가 열심히 웃기며 잘 했고 특히 마지막에는 관객들도 다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며 엄청난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심사위원장인 당시 학생부학장 고재군 교수님(농토목)이 심사평에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 무대의 피날레 곡인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라는 가사를 문제 삼으시면서 학생신분에 어떻게 이런 노래를 할 수 있냐고 야단치시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꼴찌를 하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 그 이후로 이 노래가 우리 원예학과의 과가(科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내가 교수로 부임한 1988년 이후에는 과 대항 배구대회에서도 우승을 했고, 농대 축구부 출신인 손정익 교수가 부임한 후로는 축구도 우승을 했다. 그러나 모두를 겪어본 내가 보기에는 처음 우승이었던 야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원예학과 50년 회고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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