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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뵙고싶었습니다 | 우리나라 양송이 산업의 대부 박재형(농화학 48)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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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16 15:53 조회2,0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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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양송이 산업의 대부
박재형(농화학 48) 동문
 
 
 
 
반갑습니다. 우리가 언제 농대에서 만났지요?
내가 1926년 장성에서 태어나서 자라 서울 경기중학교에 들어갔어요. 그 당시 고등학교인 경성제대 문리대 예과로 진학하여 2년 수료하고 농대로 갔지요. 당시 조백현학장이 3학년으로 편입해도 된다고 하셨으나 자진해서 1학년부터 다시 다녔어요. 졸업 후 1953년 전남주정회사에 취직하고 얼마 안 되어 회사가 문을 닫게 된 후에도 근무하던 시험실 관리를 계속 맡게 되었는데 그 곳이 일제 시 군수공장으로 쓰이던 곳으로 많은 장서가 남아 있었어요. 어느 날 그중에 수산으로 전분을 당화해서 만드는 논문을 발견하고 이를 탐독, 연구한 결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수산당화 투명 물엿공장을 시설했고 해태제과에서 이를 인정하여 공급하기로 했는데, 본격적인 생산단계에서 원료인 전분이 미국에서 보내주는 구호물자인지라 갑자기 공급이 중단되어 계속 생산을 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1957년도에 광주에서 전남농약이 설립되고 자격증 소유자로 초빙되어 근무하게 되었는데 중앙의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 회사가 유지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부대사업으로 서울대를 같이 졸업한 동학 유태종 박사의 지원으로 양송이 재배가공을 기획했던 것이 우리나라 양송이 산업의 시발점이 되었지요.
 
양송이버섯을 언제부터 생산하셨나요?
1959년 전후, 무안, 여수 등지에서 일제 때 만들어 놓은 폐방공호에서 시험재배를 거쳐 농림부의 지원으로 광산군 평동에 재배단지를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교토에 가서 시설과 가공법을 습득하고 본격적으로 당시 광주시에 양송이 가공공장을 시설하고 광주제일농산에서 최초로 양송이 통조림을 생산하여 일본에 수출했습니다. 수출액은 2,900달러로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양송이통조림을 수입한 일본 미쓰이 물산의 전무가 버섯통조림 품질이 아주 좋으니 수출량을 늘리도록 장려해 달라는 부탁 서신을 장기영 당시 부총리에게 보내왔습니다. 그때 일본에서 양송이 재배영상도 함께 보내왔는데 그 사실이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전해졌나 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양송이 재배를 농업특화산업으로 지정하게 되었고 생양송이의 메카로 부르는 부여 석성에 삼원농산이라는 큰 양송이 재배 및 가공시설과 종균공장을 김종필 씨가 짓게 됐지요. 그리고 나서 1965년에는 광양지구에 10,000여 평의 재배 농가단지를 내가 직접 조성하고, 당시의 재벌인 단사천씨 계열의 투자를 유치, 계양식품을 설립하고 양송이를 가공 수출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농림부장관상을 받았습니다. 1970년에는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 재배면적 8,000평의 대형 기업재배사와 통조림 가공공장까지 갖춘 대원산업을 설립 운영하여, 200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하고, 1972년도엔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습니다. 그 후 1974년도에 전라남도와 농림부에서 전남 양송이의 재건에 참여하라는 요망이 있어서 담양군 대치면에 현대식 재배사 4,000평과 가공공장을 시설하였으나, 재배 도중에 대형보일러가 폭발해 안타깝게 다수의 인명피해와 막대한 손실을 입어 회사부도와 함께 형사적 책임을지기도 했던 아픈 기억도 있습니다. 그때 집에서 칩거하며 몇 년을 무료하게 보냈지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 뒤로 캐나다에서 지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양송이 재배를 하고 있던 교민 20가구의 요청으로 1978년도에 농림부 추천을 받아 지도자로 파견되어 3년간 양송이 재배 지도를 하였지요. 그 당시는 이민이 어려울 때인데 캐나다 교포 재배농들이 계속 지도해 달라고 이민허가까지 받아주는 등 수속을 다 처리해 주었는데 집안 반대로 결국 포기를 했어요. 그 후 1981년 나이지리아 고위층이 주말농장에서 양송이 재배를 원하니 가서 도와달라고 대우그룹과 연관이 있는 사업자가 초청하여 약 30개월간 나이지리아에서 머물렀어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때마침 쿠데타가 발생하여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고 정상 출국이 어려워져 부득이하게 몰래 빠져 나왔지요. 나이지리아 체재 중에 인도양송이 연구소와 교류가 꾸준히 있었는데, 초청도 받았었고 또한 농장에서 같이 일하던 인도 친구가 인도에서 양송이 사업을 하자고 요청하여 약 60일간 인도에서 체류하면서 준비단계가 끝나가는데 인도 간디 수상 암살사건으로 관련 국회의원이 실격되고 이것저것 모두 무산되어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에도 다양한 농장의 지도를 하며 소규모 농장을 직영하던 중에 1995년 네덜란드와 일본의 양송이 재배업자와 공동경영을 추진, 나주시 산포면에 재배사 600평 규모의 농장을 시설하고, 퇴비와 버섯을 잠시 일본으로 수출했으나 시설의 미흡과 수출상의 문제점으로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양송이 사업에 관여하고 계신가요?
양송이 산업에 대한 애착과 미련은 간절하지만 나의 무능과 노쇠, 그리고 관계기관의 무관심 등으로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양송이 산업은 아직도 선진국의 7~80년대의 생산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일신농장(양송이재배와 가공)을 운영하는 김용안 사장을 유망한 후계자로 마음에 두고 고문 역할을 하며 앞으로 우리나라 양송이 업계가 발전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1980년 전후 우리나라는 기업농 중심으로 양송이를 생산하여 통조림으로 당시 5천만 달러까지 수출을 했으나, 이후 대만과 중국에 밀려 기업농은 거의 몰락하고 소규모 농가재배로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김용안 사장은 일찍부터 생양송이의 내수유통에 종사하며, 농가재배의 바탕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 한때는 전국시장을 장악한 적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접 재배하여 양송이 사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뜻으로 지금의 장소에 재배면적 3,000평을 마련했는데, 때마침 국내에 피자 붐이 일면서 피자 주원료의 하나인 양송이를 대형 피자회사에 가공 납품하기로 계약하고 유럽에서 선진가공시설을 도입하는 등, 기업농으로 현재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낙후된 우리의 재배시설과 기술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나와 함께 1년여 동안 10여 차례 선진 지역을 시찰하고 연구하여, 나주시 금천면에 자비 15억 원을 들여 배지 생산 시설을 설치했어요. 그러나 생산량이 자체소비용에 불과하여 앞으로 농가에 공급할 시설 증설을 구상 중에 있고, 선진국에 준한 수율(생산성)제고를 위한 현대적 시설을 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의욕적이고 유능한 그가 꾸준히 이 산업의 발전에 공헌하도록 제가 기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배석하신 김용안 사장께서 한 말씀 해주세요.
우리 회사 명예 회장님이신 박 회장님은 우리나라 양송이의 대부로 이 분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 인공배양버섯의 오늘이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노구를 이끌고 저와 함께 10여 년에 걸쳐 여러 선진국의 양송이 사업현장을 안내, 견문의 길을 터주시고 가능한 기술과 시설을 적용, 설치하도록 해주셨어요. 나아가 미숙한 저에게 과분한 기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니 제가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하고자 다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서예를 하시며 책을 쓰고 계신다고요?
내 나이 75세 때, 평생소임을 마감하고 자문 역할만 하고 있자니, 어린 시절 조부님 슬하에서 잡았던 붓글씨를 쓰고 싶어졌고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하던 차에 좋은 스승을 만나 서예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0여 년 내에 서예계의 대상을 받고, 심사위원장까지 맡게 되는 영예까지 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뜻과 주변의 바램을 떨칠 수가 없어서 나주지역 언론사인 빛가람타임스에서 마련해준 서실에서 주2회 두 시간씩 후진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동안 써놓았던 글씨들을 모아 서집을 출판 중에 있는 상태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초서와 한시가 비실용적이고 난해하다며 멀리하지만 저는 붓글씨를 쓰면서 초서와 한시에 매료가 되었어요. 천학 졸필이지만 초학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생을 다 바쳐 ‘초서와 한시’를 집필 중에 있습니다.

- 책이 출간되면 동창회로 소식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늘 강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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